일과가 많이 단조로워졌다. 딸과 아침을 같이 먹고 아이를 태워다준다. 바로 운동하러 갔다가 집에 와서 책을 읽고 점심을 느긋하게 먹고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쓰거나 좀 쉰다. 다시 아이를 태우고 와서 산책을 할 때도 있고 (안할 때도 있고) 같이 카페에 가기도 한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각자 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순서가 좀 다를 때도 있다. 어떤 날은 태워다주고 다시집에 와서 책을 읽고 할 일을 하고 운동을 갔다가 바로 아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태우고 오거나, 아예 집에 들르지 않고 카페에서 오래 일을 하다가 아이를 태우고 올 때도 있다. 어쨋든 하는 일의 가짓 수가 몇 가지 되지 않아서 단조롭고 예측 가능하여 안정감 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자연의 변화와 날씨의 변화를 바로바로 체감하고 눈앞에 펼쳐진 자연을 보니 정서가 순화되었다. 매일 땅과 들판과 산을 보는 일이 이렇게 자연스러워 질줄이야. 눈이 편안하고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기분이 든다. 내 일상을 간섭하거나 재촉하는 사람이 없어서 느긋하고 게으르게 있어도 신경쓸 일이 없어서 괜찮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그렇게 두지 않고 뭐라도 하는 스타일이다.)
아이랑 산책하는 날에는 동네 개들의 안부를 먼저 살피러 간다. 개들이 어찌나 딸 아이를 반기는지 멀리서도 보자마자 미친듯이 꼬리를 흔들고 가까이가면 배를 까고 드러눕고 난리다. 아이는 한참동안 쓰다듬어주고 안아주기도 하고 사랑을 듬뿍 준다.
걷다보니 어느 집에 그림같이 예쁘게 걸린 곶감도 보았다. 색감이며 집과 조화로운 그 모습에 감탄하며 "맛있게다" 를 연발했다. 보기만 해도 말랑달콤함이 느껴지는 고운 자태. 리틀 포레스트 영화에서 감을 깎아 끼우던 장면과 엄마가 그걸 만지작 거리며 "곶감이 맛있어 진다는 건 겨울이 오고 있다는 거"라던 대사도 생각난다. 추워지고 있어서 그런지 곶감이 맛있어 보인다.
딱히 할 일이 없었던 지난 주 어느 날은 같이 맛있는 밥을 먹으러 갔다. 탁 트인 길과 차가 없는 한적한 도로도 좋았고(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곳) 식당 앞에 놓인 수많은 장독대들은 그 자체로 시간을 머금은 예술 작품 같았다. 둘이 먹기에는 너무 푸짐한 상차림에 반찬이 많이 남을까봐 꾸역꾸역 잔뜩 먹었다. 그러고도 남는 음식들이 아까워 나물을 싸왔는데 금방 변해버렸는지 상한 냄새가 나서 결국 버렸다. 속상해.
집 앞에는 꽤 넓은 텃밭이 양쪽으로 있다. 고구마 수확을 했는데도 아직 텃밭에 무성하게 남아있는 게 보여서 맨손으로 몇 개 캐냈다. 손가락 만큼 작은 것도 있고 제법 모양이 예쁜 것도 있고 엄청나게 두껍고 우악스럽게 생긴 것도 있었다. 괜찮아보이는 것을 몇 개 쪄봤는데 영 맛이 없고 질겼다. 역시나 그냥 남겨둔 건 이유가 있었던 거다. 제때 캐놓은 애들이나 맛있게 챙겨먹어야 겠다.
반대쪽 텃밭에는 블루베리 나무들이 있는데 작은 아버님께서 거름을 잔뜩 주고 가셨다. 블루베리는 흙도 따로 쓰이는 게 있어서 은근 까다롭다. 유독 비실대고 말라서 곧 죽을 것 같이 보이는 한 그루가 안쓰럽고 걱정이 된다. 부디 힘을 내서 줄기를 키우고 새 잎을 내기를.
나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블루베리 잎도 단풍 들듯이 잎 색깔이 알록달록 물들었다. 그리고 꽃망울처럼 새 잎을 내고 있는 나무들이 기특했다. 내년에 더 풍성하게 열매를 많이 맺어주면 좋겠다. 잘 익은 열매를 직접 따서 먹는 수확의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이렇게 여유롭고 마음이 편하니 머리서기 연습도 잘 되는 것 같다. 요가수련은 명상에 가깝고 명상은 안정과 균형이 중요한데 연습 이틀차인 오늘 시르사아사나를 성공해버렸다. 어제는 감을 영 못잡겠더니 오늘은 뭔가 안정감있게 상체가 지지되는 느낌을 받았다. 될 것 같다는 감이 들어서 천천히 복부를 말아 올리며 다리를 들었더니 얼추 괜찮은 자세가 나왔다. 생각보다 오래 버티기까지 했다. 역시 노력하면 나아진다. 나 자신 아주 칭찬해!
단순하게 사는 요즘이 참 좋다. 연구년 보고서만 아니면 더 행복할 거 같지만 이건 빨리 해버리지 않고 싫은 건 끝까지 미루면서 데드라인까지 끌고가는 내 게으름 탓이니까 할 말이 없다. 내일은 꼭 밤을 새서라도 정산서와 보고서 작성을 완료해서 제출하고 말리라.
금요일부터는 진정한 자유의 몸이 되고 싶다. 별일 없이 무사무탈한 날에 감사하며 오늘밤은 악몽도 꾸지 않고 쓸데없는 걱정으로 잠을 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덧)보고서 끝내면 브런치 글도 데드라인 되기전에 쓰지 않고 낮에 쓰겠다는 결심을 지켜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