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수업의 재평가
고등학교 시절 ‘농업’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특목고도 아니고 도시에 위치한 인문계 고등학교에 내신 정규 과목으로 농업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하다. 해당 과목에선 나무 가지치기, 모종, 가축의 생산성 등 실제 농업에 관련한 전문적인 내용을 배웠다. 농업이라는 소재 자체가 학생들에게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과목이었기도 하지만, 농업 수업 시간을 기피했던 가장 큰 이유는 꽃 이름 외우기 때문이다.
당시 농업 선생님은 컬러로 스크랩이 된 꽃 사진을 보여주며 이름을 외우게 하셨다. 꽃이라고는 장미, 민들레 정도만 구분할 줄 알던 우리에게 60여 가지가 넘는 꽃 종류의 사진과 이름을 외운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종류의 꽃이 있다는 것이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게다가 농업 선생님은 교내에서 가장 폭력적인, 소위 말하는 XX개 스타일이라서 농업 시간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수업 방식은 1명씩 교탁으로 나와 약 10장 정도의 랜덤 하게 펼쳐지는 꽃 이름을 맞추는 것이다. 마치 신서유기에서 나PD가 사진을 하나씩 띄우며 게임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문제를 틀릴 시 살기를 내뿜는 선생님의 몽둥이에 얻어터진다는 점이다. 얼마나 얻어맞았으면 다른 학교 학생들은 버스 안에서 수능 영단어를 암기할 때 우리 학교 학생들은 꽃 이름을 외우고 있었을까.
그리고 시간을 흘러 2015년 3월, 지금의 와이프를 처음 만난 소개팅 자리의 일이다. 첫 만남의 가장 효과적인 대화법은 역시나 서로의 취향과 취미를 공유하는 것. 취미가 뭐냐는 나의 질문에 '꽃을 좋아해 꽃꽂이를 즐겨한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순간 나는 10여 년 전의 농업 수업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네 저도 꽃 좀 잘 압니다. 특히 멕시코 원산지의 대극과에 속하는 포인세티아를 좋아합니다. 오늘 여기 오는 길에 화단에 피어있는 팬지가 특이 아름답더군요. 하하하"
고등학교 시절의 아이러니했던 농업과목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동반자와 시작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꽃 이름을 외운다라니? 이런 낭만적인 수업이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