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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위기, 사직서 내기 좋은 날

by 혜온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 말고, 지은님 안에 다른 질문은 없나요?”

“다른 질문이요? 그럴 겨를이 없어요. 시험 외에는...”

그녀의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진짜 문제는 바로 그거예요. 다른 질문이 없다는 거...”

“네? 시험 하나에만 더 집중해도 부족하지 않나요?”

늘 자신의 집중력 부족을 탓하고 있던 그녀로서는 예상치 못한 전개였을 것이다.


질문의 힘은 대단하다.

질문력은 인간을 날아오르게 한다.

마치 산정상에서 산 아래를 바라보는 것처럼, 순식간에 초월하여 전혀 다른 관점으로 현재를 바라보게 한다.

'내가 왜 이것 때문에 괴로워했지?'

크게 확대되어 보이던 문제가 작은 점만 하게 보이는 넉넉한 시야를 갖게 된다.

어디서 시작됐는지, 그리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질문을 통해 완전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맥락을 한눈에 통찰하고 나면 비로소 여유와 충만함을 맛볼 수 있다.

'아, 이게 진짜 행복이구나'

질문 끝에 마련되어 있는 행복은 정말 달콤하고 무해하다.


"지은님은 일단 자신의 루틴을 멈추고 메타학습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학습이 제 궤도에 오르고 안정적으로 작동하려면 다음 단계의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걸 못하면 다시 원상복귀되고 성장은 기대할 수 없어요."

"아, 그게 다른 질문이군요?"

“네, 만일 시험 합격만 생각했다면 아마 나는 합격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녀는 나의 지난 수험생활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1999년 IMF 위기의 여파가 아직 거세던 시기, 나는 공무원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앞날이 불투명한 고시생의 길을 선택했다.

불안할 법도 하고 머지않아 후회가 밀려올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나의 멘탈은 의외로 평온했다. 서른 넘어 늦은 나이에 시작한 수험생활임에도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왜 이 시험을 준비하는가”에 대해 묻고 또 묻는 질문의 과정 덕이었다.

그 당시 난 정해진 시간에 매여서 일하는 게 제일 싫었다. 힘들게 들어간 직장이었지만 일에서의 보람은 좀처럼 느낄 수 없었다. 시간만 채우면 따박따박 월급이 나오지만 돈보다 그렇게 버려지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배부른 투정이다. 배고프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운 좋게도 나는 변화의 문턱을 넘었고 그에 걸맞게 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퇴직하기 얼마 전, 파리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일하다가 우연히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너무 화창한 계절이었다. 공원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내 시간은 현실의 벽에 갇혀 있구나.'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감옥이구나.'

난 행복하지 않았다.


공무원 조직에까지 구조조정 칼바람이 불던 IMF 시기였다. 주로 승진에서 밀린 고참 선배들이 그 대상이었다.

‘어차피 그만둘 거라면 바로 지금이야!’

누군지 모를 한 사람의 가정을 지켜줄 수 있는 그때가 사직서 내기 딱 좋은 타이밍임을 나는 직감했다.

다른 한 편으로는 하루라도 빨리 나의 공부법을 시험에 적용해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

퇴사를 결심하고 나니, 합격은 보너스일 뿐 난 이미 충분히 행복했다.

‘시험에 떨어지고 고시촌에서 풀빵 장사를 해도 좋아. 그게 지금보다는 훨씬 행복할 테니까.’

귀국 후 신림동 고시촌에 집을 구하고 나서 들었던 생각이다. 나만의 행복론, 실패해도 괜찮은데 무얼 걱정할까.

시험을 떠난 시험 선택의 이유, 왜 그것이 나를 합격의 지름길로 들어서게 한 것인지 이제는 정확히 안다.


“내가 하는 일의 궁극적 의미를 질문하는 것은 수험생활과 그 이후의 삶을 더 성공적으로 끌고 가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에요.”


바로 앞만 보고는 똑바로 달릴 수 없다. 저 멀리 최대한 멀리 보고 있어야 흔들림 없이 달려갈 수 있다. 힘들수록 다른 질문을 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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