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뒤로 걸으면 시간도 거꾸로 갈까? 나 해볼래"
어린아이의 산만함과 엉뚱한 질문은 우리를 미소 짓게 한다.
귀찮을 때도 있지만 이보다 더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이 있을까.
우리의 어릴 때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게 다 탐구 대상이고 질문이 넘쳐난다.
지적 호기심 뒤에는 늘 질문이 있었고 뭔가를 알아 가는 과정은 무척 재미있는 일이었다.
개미 한 마리도 한참을 관찰하고 당연한 현상에도 “왜?”를 물었다.
질문력이 시작되는 시기의 모습이다.
메타학습은 이 질문력을 고차사고로 전환하는 작업이다.
이게 잘 훈련되면 인간은 정말 초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혹시 기억할 수 있는가? 이 즐거움이 멈춘 때를.
학교 공부가 시작되면 아이는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 많던 질문력은 어디로 간 것일까?
변리사인 내가 메타학습법을 발굴하게 된 것은 그나마 질문력이 남아있는 발명분야에서 일을 했기 때문이다. 직업적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교육문제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먼저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교육문제에 늘 열려있었기에 발명과정을 보고 바로 메타학습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발명자들은 여전히 아이처럼 생각하고 탐구하는 몇 안 되는 부류이다. 그들은 늘 질문이 넘치고 그래서 활기차다. 우울증, 무기력? 그런 거 없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조직 속에서 정해진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무기력한 발명자도 상당히 많았다. 좋은 직장에 소속된 사람일수록 그랬다. 질문이 없었다.
‘왜 ‘왜?’를 묻지 않을까?'
피로에 찌든 그들이야말로 내게는 좋은 질문이 되었다.
요즘 TV를 보면 연애 예능이 인기다. 아이러니하게도 학습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그곳에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학습 본능을 발견할 수 있다.
여러 남녀가 출연하여 자신의 짝을 찾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맘에 드는 상대가 생기면 갑자기 질문도 많아진다. 상대를 더 알아 가는 재미에 빠져 긴 대화도 힘든 줄 모른다.
“나에 대해 뭐 궁금한 거 없어요?”
반면, 관심 없는 상대 앞에서는 이런 질문을 받아도 딱히 궁금한 게 떠오르지 않는다. 없는 질문을 짜내느라 버벅댄다.
인간의 학습 본능은 관심이 생길 때 비로소 작동한다.
이게 자기 주도성이다.
단순 암기식 학습이 욕을 먹는 근본적 이유도 이것의 부재 때문이다. 강요된 학습은 마치 궁금한 것 없는 상대와 마주한 것처럼 고역이 된다. 그런 재미없는 학습에 길들여지면 무관심과 무질문, 그리고 다시 무기력한 학습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질문을 해봐. 왜 질문하지 않니?”
“우리 아이는 궁금한 게 없대요.”
세상은 학습력을 잃은 아이에게 질문력을 심어주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건 소화력이 마비된 사람에게 식욕을 기대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학습력과 질문력의 상호작용을 무시하고 질문력만 회복할 방법은 없다. 결국은 질문도 주입하여 점수를 매기는 촌극이 벌어지고 만다.
메타학습의 핵심은 단순하다.
‘해야 하는 학습’에서 ‘하고 싶은 학습’으로, ‘Learning’에서 ‘Research’로 전환하는 것이다. 결국, 학습의 주도권 문제다. 자기 주도가 안 되면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다.
씨를 뿌리고 모종을 키워내는 것처럼, 메타학습은 관심과 질문력을 소중히 보존하고 키워서 고차사고의 힘을 키워주는 느린 학습이다.
“요즘 공무원 시험 커트라인이 높아지니까 난이도도 계속 올라갈 수밖에 없어요. 킬러 문항까지 등장하기 때문에 대응하려면 더욱 깊이 있는 학습이 필요해요.”
더 깊게 안다는 것은 더 많은 배경 이야기를 아는 것이다.
역사를 벗어난 지식은 없다.
메타학습을 하게 되면 스스로 과거로 이어지는 맥락을 찾아가면서 깊이 있게 파고든다.
이런 학습은 처음에는 시간이 더 든다고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결국은 그게 지름길이고 경쟁력이 된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어떤 문제가 출제되어도 자신의 답안을 작성할 수 있는 응용력은 단순 암기로는 만들어질 수 없다.
또한, 문제의 이유를 알게 되므로 높은 적중률의 예상문제도 척척 만들어 내는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실제로 나는 2차 논술시험 예상문제로 뽑아뒀던 문제 중에서 2개를 그대로 적중시켰다. 그때의 전율은 지금도 생생하다.
“메타학습이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니 희망이 생겨요. 생각해 보니 공부하는 내내 정말 질문은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내담 후 처음으로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지은님이 메타학습을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스스로 질문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변화였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