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버타주의 캔모어에서 (1)
캐나다 캘거리에서 서쪽으로 81km 떨어진 곳에 캔모어라는 도시가 있다. 밴프 국립공원으로 진입하기 바로 전에 있는 도시라, 캘거리에서 밴프로 향하는 여행자들에게 어쩌면 밴프의 첫 관문이 되기도 하는 도시다. 북미권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한국에서 출발하는 여행자라면 캔모어는 아마도 그냥 지나치기 쉬운 도시일 수 있다. 이미 유명한 관광지는 밴프와 재스퍼에 다 몰려있으니, 하루가 부족한 여행객들에겐 작은 시골 동네에서 머무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도시에 머무르게 된 이유는 꽤 명료했다. 밴프와는 차로 15분 거리로 가깝지만, 숙박비가 그보다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여행은 언제나 단순한 이유로 떠나게 되지만, 다녀오면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새로운 도시를 잊지 못하게 된다. 그곳이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캔모어에서 온전한 하루를 보낸 날의 아침이었다.
이른 시간 무화과와 견과류를 넣은 요거트를 아침으로 간단히 챙겨 먹고, 산책을 하기 위해 서둘러 숙소를 나왔다. 캔모어의 날씨는 맑다가도 갑자기 비가 오면서 무지개가 뜨고, 바람이 불다가 또 금세 맑아지는 변화무쌍한 날씨를 가지고 있지만 이날은 이른 아침부터 맑게 갠 하늘에 예쁜 구름만 평화롭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숙소에서 작은 다운타운까지는 도보로 15분. 맑은 공기를 잔뜩 들이쉬며 웅장하게 서있는 로키 산맥을 양쪽으로 품고 걷기 시작했다.
맛있는 베이글집과 동네 카페들이 모여있는 다운타운 뒤쪽으로 비밀스럽게 숨겨진 산책로가 하나 있다.
안 그래도 한적한 시골 동네에서 더 깊숙한 숲 속으로 들어오니 째깍거리는 새소리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쭉 뻗은 침엽수 사이를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동네 사람들로 보이는 사람 두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재잘재잘 대화를 하다가 우리에게 Good morning! 하고 웃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이젠 지나가던 사람이 인사를 건네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여기 사람들은 이렇네, 우리랑 문화가 다르군 하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나는 그냥 그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졌다. 그리고 그 친절을 그대로 내 안에 들여다 놓았다. 그래서 우리도 Good morning!
사실은 이 산책로를 걷기 시작할 때부터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아름다운 침엽수 사이로 흐르는 강물이 보였는데, 그 색감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투명하게 흐르는 에메랄드 색의 강. 보우강(Bow River)이라고 한다. 보우 빙하(Bow Glacier)에서 발원하여 레이크 루이스(Lake Louise) 마을을 향해 남쪽 방향으로 흐른다. 그 후 캘거리를 거쳐 South Saskatchewan River라는 큰 강으로 합류하게 된다.
보우강은 노먼 맥클레인의 원작 소설, 그리고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배경지가 된 곳이다. 크레이그 셰퍼,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
영화 속에서 노먼과 폴이 플라잉 낚시를 하던 강이 바로 보우강이다. 빙하가 녹아 물이 된 강은 아침 햇살을 받아서인지 특유의 에메랄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듬성듬성 바위를 타고 흐르는 강물에 반짝이는 별을 박아놓은 것 같았다. 도저히 멈출 기세가 없는 물살은 차분하지만 강인해 보인다. 상반된 분위기가 동시에 느껴져, 마치 영화 속의 차분한 노먼과 거침없는 폴의 모습을 합쳐놓은 것 같았다.
'오롯이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오롯이 사랑할 수는 있다'
짧고 강렬한 영화 속 대사와 풍경의 힘이 합쳐지면 귀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타인의 삶, 그렇지만 자신의 삶도. 오롯이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온전히 사랑하며 나아갈 수는 있지 않을까. 명문대를 진학하고 좋은 직장을 다니며 안정을 추구하는 노먼은 삶에 대한 모험심을 가진 폴에게, 거침없이 자유를 만끽하며 모험을 즐기는 폴은 건설적인 삶을 살아가는 노먼에게, 형제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감을 받는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지 않고, 누구를 쫓을 필요도 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의 섭리를 따라.
기후변화 때문인지, 캐나다의 9월은 완연한 가을이 온 것 같진 않았습니다. 우리는 따뜻한 온도의 특혜를 누리는 것 같지만 노랗게 물들어 있어야 할 나뭇잎이 아직 초록색인걸 보면 걱정이 되기도 해요. 하지만 본 적도 없는 색감의 조합이 한눈에 들어오는 걸 보면 어쩔 수 없이 감탄하게 됩니다. 얄팍한 인간이라 그런 걸까요. 흔들림 없는 바위 산맥과 흘러가는 에메랄드 강물 사이로 보이는 노란빛의 나무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다시 걸었습니다.
마침 서있는 쪽으로부터 저 멀리 반대편에 두 남자가 가만히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정말로요.
영화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