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버타주의 캔모어에서 (2)
캔모어 다운타운에서 살짝 벗어나면 보우강을 가로지르는 엔진브리지라는 곳이 있다. 1891년에 캐나다 태평양 철도(CPR)가 탄광을 공급하기 위해 건설한 다리인데 현재는 도보로만 이동할 수 있다. 에메랄드 빛 강을 가로지르는 단단하고 무게감 있는 철제 다리가 묘 할 정도로 순수한 자연에 편입된 것 같았다. 100년이 훌쩍 넘어 여기저기 녹이 슬고 벗겨진 모습이 오히려 웅장한 산맥과 잘 어우러진다. 그 장관 덕분인지, 미국 HBO에서 방영된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The Last of Us)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나는 운이 좋게도 이런 모습을 그저 감탄만 하며 바라볼 수 있지만 이건 134년 전 많은 사람들이 일궈낸 노동의 집약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채굴한 석탄을 이 다리를 통해 옮겼을 거라는 것도. 자연, 건축과 역사 그러고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그 안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특권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낯선 도시의 이른 아침은 보통 쉽게 잊히지 않는다. 코로 들이쉬어지는 공기조차 새롭게 느껴질 정도다. 거리를 산책하는 동네 주민들은 아주 가끔씩 보일 뿐. 어떤 기억도 추억도 없는 미지의 도시를 한시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보물 같은 시간이다. 여행을 가서 약간의 부지런을 떨면 이렇게 큰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숙소에서 나와 캔모어의 작은 다운타운을 걸었다. 15분 남짓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작은 동네에 오래된 카페에 가려고 한다. 아침을 요거트로 간단히 먹고 나왔으니 따뜻한 커피가 필요한 시간이었다. 아직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열지 않은 시간, 잘 정돈된 길을 따라 조금 걸어서 그 카페에 도착했다.
이름은 비머스 커피바(Beamer's Coffee Bar). 1993년에 문을 연 이 카페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동네 주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구시가지에 1호점이, 신시가지에 2호점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모던하지 않은 인테리어가 카페의 축적된 시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둔탁하게 생긴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니 왼쪽 벽면에 밴프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레이크 루이스(LAKE LOUISE)'를 담은 그림이 걸려있었다. 이 동네에 사는 어느 멋진 아티스트의 작품이라고 하니, 잠깐 사이에 이 카페가 더욱 좋아졌다. 카운터에는 아침 식사용 베이커리가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고 바리스타들은 주문받은 커피를 바쁘게 제조하고 있었다.
불은 피워져 있지 않았지만 오래된 벽난로가 있었는데 마치 깊은 산속 산장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따뜻한 블랙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밖이 내다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뒤쪽으로는 할아버지 두 분이 무엇에 대해 조용하게, 그러나 열띤 토론을 하고 계셨고 그 옆 테이블에는 맥북을 앞에 두고 손님 한분이 앉아있었다. 어떤 일을 하시는 걸까, 글을 쓰고 있을까? 이런 카페에서 글을 쓸 수 있다면.. 하고 잠깐 상상했다.
세대와 나이를 불문하고 이런 사랑스러운 장소를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인 것 같다. 자연스러워야 할 모습이 그렇지 않은 곳도 있기에, 이런 모습이 멋져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주문한 커피를 받아 들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예뻐서 휴대폰을 들었다. 영상을 하나 찍어놔 볼까? 하는 마음에서. 카메라를 들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있는데 갑자기 자전거를 탄 아이가 프레임 안으로 훅! 들어왔다. 그 아이의 앞쪽으로는 큰 자전거를 탄, 아빠로 보이는 어른은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자신의 딸이 잘 쫓아오고 있는지 뒤를 돌아봤다. 밝은 핑크색 옷을 입고 등에는 커다란 가방을 멘 귀여운 아이는 그런 걱정일랑 말라는 듯, 보도의 작은 턱은 아무렇지도 않게 훌쩍 뛰어넘어버린다. 역시 약간의 부지런을 떨면, 이렇게 사랑스러운 모습까지 덤으로 볼 수 있다. 아이는 유치원에 가는 중이겠죠?
이곳에서 어느 저녁나절에 갔던 초밥집 아저씨도 생각나요. 다 먹은 그릇은 본인이 치우는 그런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가진 식당이었거든요. 초밥을 다 먹고 뒷정리를 하고 나오는데 저 멀리 카운터 앞에 있는 사장님이 thank you! 하고 크게 웃으며 인사를 하시더라고요. 당연한 일을 한 건데, 작은 것에도 고마움을 표하는 그의 다정한 미소가 기억에 남아요. 왠지 모르게 기분도 더 좋아지고요! 슬쩍 드는 고마운 마음을 자주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이런 생각을 하면서 가게를 나왔어요. 여행을 하다, 숨겨진 보물 같은 시간들을 찾아내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