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t Stop Believin'
토론토의 도시 상징과도 같은 곳인 CN타워 옆에 거대한 돔 구장이 하나 있다. 이름은 로저스 센터(Rogers Centre). 세계 최초의 개폐식 돔 구장이며 일본의 후쿠오카 돔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현재 캐나다 국적의 유일한 메이저 리그 팀인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홈경기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원래는 시민들의 공모를 통해 스카이 돔(SkyDome)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2004년에 로저스 커뮤니케이션스가 인수하면서 로저스 센터가 되었다고 한다. 토론토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던 날, 이날은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다.
나는 야구에 있어서 여느 친구들처럼 어떤 선택권이 없었다. 인기 선수가 속한 구단, 지금 1위인 팀, 굿즈나 유니폼이 예쁜 팀을 응원하는 그런 것들. 그냥 아주 어릴 때부터 잠실 야구장 1루 쪽에서 색칠 놀이를 하다가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줄곧 한 팀만 응원하고 있다. 우리 엄마의 아들은 그 팀의 리틀 야구단 출신인데, 자주 집 앞의 문방구 아저씨와 캐치볼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친구들보다 아저씨가 볼이 좋았단다.) 주말이면 혼자서 잠실 야구장에 가서 어린이 야구 교실에 참가했다. 그때 오빠의 나이는 10살이었고 우리 집에서 잠실까지의 거리는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거의 1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서울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초등학생이 휴대폰도 없이 야구를 하러 다녔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 꼬마는 참 대단하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 같다. 그리고 그때 받았던(샀던가?) 쌍둥이 인형은 아직도 내 방 옷장에서 얌전히 잠자고 있다.
그들(우리 팀)이 지난하게 경기에 이기지 못하던 시절이 꽤 길었다. 흔히들 암흑기라고 부르는데 정말 앞이 보이지가 않는 그런 시즌들의 연속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패가 많을 수 있어? 하다가도 야구는 주 6일 경기를 하니까 내일은 이기겠지 하는 얄팍한 희망을 가슴에 품고 다시 자석처럼 저녁 여섯 시 반 중계를 틀어놓는다. 그 시기에는 정말 진심으로 (자주 이기는) 다른 팀을 응원하고 싶었는데 역시나 번번이 실패했다. 이건 나의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님을 이때 깨달았다.
일요일 아침에 우리 집 TV채널값은 당연히 메이저리그 경기에 고정되어 있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 야구 경기를 보며(이해는 잘 못했지만) 자랐다. 어린 시절에 봤던 영화, 듣던 음악, 읽었던 책이 어떤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꿈같은 일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나에게 메이저리그 경기장에 간다는 것은 거의 상상 속의 일이었다.
그러다 대학생 때 (어린이 야구교실 출신) 오빠가 미국 여행을 간다길래 운 좋게 따라가게 되었다. 당연히 그는 일정에 메이저리그 구장을 넣었고 더그아웃 투어까지 야무지게 예약해 두었었다. 그 첫 메이저리그 구장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오라클 파크였다.
샌프란시스코 만이 근접해 있어 경기장 우측 외야 너머로 넓은 바다가 보이는 그림 같은 야구장이었다.
경기장 내 중앙 전광판의 왼편으로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코카콜라 모형과 글러브가 있는데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그곳에 조명이 켜져서 사실 경기보다 경기장의 풍경을 보는 게 더 재미있어질 정도다. 경기가 끝나고는 콘서트장처럼 넓은 구장 안에 Journey의 Don't Stop Believin'이 흘러나왔는데 그 노래에 맞춰서 어깨를 들썩이며 빠져나가던 관중들의 모습은 충격적일 정도로 좋아서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그리고 두 번째 메이저리그 구장이 6년 전에 왔던 바로 이 로저스센터다.
다시 찾은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홈구장. 경기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상하게 감정을 고조시키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티켓을 확인하고 경기장에 들어서면 100번 대열(1층과도 같은)의 시야에서 넓은 다이아몬드 구장이 바로 펼쳐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1층의 특정 좌석에 앉으려면 표를 검사하지만 3,4,5층에 티켓을 구매한 사람, 누구라도 오며 가며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두었다. 그리고 한눈에 봐도 야구장을 찾는 사람들의 비중은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다. 남녀노소, 나이와 무관하게 가족, 친구와 함께 한 손에는 커다란 피자 한 조각, 맥주 한잔. 넓고 깨끗한 복도,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고 가라는 직원들의 웃음까지 모두 그대로였다.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2회 말에 나왔던 비디오 판독 상황이었다. 블루제이스 공격. 주자가 3루에서 세잎이냐 아웃이냐를 판독하는 와중에 나오는 음악이 너무 영화 같았다. 미션 임파서블이나 매트릭스에 나오는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유명한 bgm 있잖아요.
이건 너무 유쾌하잖아! 하고 웃고 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웃으면서 비디오 판독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사람들 작은 것에도 웃음을 터트릴 줄 아는구나. 사실 어떤 비디오 판독은 경기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도 있는 상황. 대개는 홈플레이트에 손이 닿았네, 안 닿았네 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보기 십상이다. 어찌 보면 심각한 것을 유쾌하게 다루는 그런 분위기 속, 어느 팀을 응원하더라도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날 토론토는 보스턴에게 1-5로 승리를 건네주었다. 사실 6년 전에 왔을 때도 토론토는 이기지 못했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메이저리그의 내로라하는 명문 구단이자 강팀. 조금은 예상할 수 있는 경기 결과였지만 나는 고민 없이 토론토 쪽으로 좌석을 구매했다. 진 경기를 보고 나오는 토론토 팬들의 얼굴은 조금도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삼삼오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온 그들의 입가엔 미소가.
내가 응원하는 팀들은, 아니 어쩌면 야구는 패배에 대한 관대함이라는 자질을 길러주는 스포츠일지도 모른다. 지는 것은 싫지만 그런 것을 마음속에 담아두었다가는 금방 지칠 테니 어서 다음 경기를 준비하라고. 그러다 보면 도루도 성공하고 아주 가끔 홈런을 치고 한 번은 이길테니 네가 믿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그렇게 토닥여 주는 것 같기에, 우리팀을 응원하고 그들의 플레이를 보는 걸 멈출 수가 없다.
저는 여행을 다녀와서 보스턴 레드삭스 야구 모자를 샀어요. 아무래도 모자는... 레드삭스가 예뻐서...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