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오랜 시간 결핍에 물들여 있었다고 해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것이 유일한 진실이다. 삶을 통해 습득된 모든 경험과 생각들은 진실을 가리고 있는 환영에 불과하다. 진실은 언제, 어디서나 큰 힘을 발휘한다.
우리라는 존재는 경험이 있기 이전부터 시작되어, 경험한 모든 것들 너머에 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 ‘나’라는 환영에서 깨어나는 것뿐이다.
나는 돌 사진이 없다. 엄마는 돌 무렵 사진관에서 촬영은 했으나, 돈도 없고 이사도 다니느라 찾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이 일로 평생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그때 꼭 찾아야 했는데…”라며 둘러댔다.
아기였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10개월 무렵 찍은 것처럼 보이는 오래된 사진 속, 손톱만큼 작은 전신사진이 유일한 아기 때 모습이다.‘이게 정말 나일까?’싶을 정도로 얼굴 윤곽은 희미해서 보이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사진 속 아기의 모습에는 나라는 느낌이 담겨 있다. 이모의 증언으로는 아들을 원했던 부모님이 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몹시 실망했다고 한다. 이모는 그렇게 말할 때마다 “너희 중에 혜진이가 제일 예쁘고 귀여웠어”라는 말을 덧붙였다.
가끔 ‘세상에 나오자마자, 자신이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모님에게 거절당한 아기의 마음이 어떨까?’라고 궁금해지곤 했다. 하필 3월에 태어나 단독 생일 파티를 매번 기대했었지만, 우리 집 생일 파티는 1년에 단 한 번만 거행되었다. 부모님이 가족계획을 잘 세운 건지, 아니면 조물주의 장난인 건지 나를 제외하고 언니와 동생들은 모두 2월에 태어났다. 그래서 우리 집 생일 파티는 2월 중, 그것도 날짜가 제일 늦은 남동생의 생일에만 열리곤 했다. 생일날, 케이크의 촛불을 불어 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런데 케이크는커녕 자기들 마음대로 2월에 생일을 맘대로 퉁치고는, 3월이 되어 까마득히 잊어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참 답답한 것이 이쯤이면 ‘ 인생에서 생일 파티는 글렀구나.’라고 생각하면 그래도 좀 덜 실망했을 텐데, 내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기대를 버릴 수가 없었다. 친구들의 생일 파티에 초대를 받는 날이면, 온전히 주인공이 되어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그 모습을 볼 때면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꽃 장식이 가득한 케이크의 촛불을 부는 모습을 상상했다.
“ 아빠, 이번에는 나 파티해 주면 안 돼?”
엄마에게 말해봤자 씨알도 안 먹히고 욕만 먹을 것이 뻔했다. 아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졸라댔다. 아빠는 엄마처럼 화를 내거나 때리지는 않지만, 지키지도 못하는 약속을 번번이 하고 어기기 일쑤였다.
“그래 ”
혹시나 했던 기대는 역시로 끝나 버렸다. 생일날 아침 닭똥 같은 눈물을 뚝 뚝 흘렸다. 밥상머리에 앉아 미역국 대신 욕을 꾸역꾸역 먹어야 했다.
“2월에 케이크 먹었으면 됐지, 뭘 그렇게 자주 먹냐?”라고 엄마는 말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것인지 참으로 답답했다. 1년 내내 먹어도 케이크는 절대로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낮에도 컴컴한 비닐하우스인 우리 집에서 파티하기 위해 모인 친구들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내 생일도 생일이지만, 친구의 생일 파티에 초대를 받아도 문제였다. 선물을 사 가려고 엄마에게 오백 원만 달라고 했다가 죽일 듯 쏘아보는 눈빛에 더는 말도 못 꺼냈다. 공책을 찢어 생일 축하한다고 편지만 써서 전달했다가 염치없는 아이로 낙인을 찍혔다. 언니는 나를 한심해했다.
“나는 그래서 초대받아도 일부러 안 가. 너는 선물도 없으면서 거길 왜 갔냐?”
“선생님이 선물보다 마음이 더 중요한 거랬어”라며 입장을 고수했지만,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마음 같은 건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았다. 나 역시 친구의 생일 축하보다도 파티에서나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을 더 많이 기대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엄마’ 하면 가장 떠오르는 엄마의 모습은 언제나 ‘화가 나,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엄마가 나를 부르는 것도 내가 엄마를 부르는 것도 싫었다. 두 가지 다 기분이 유쾌했던 적이 별로 없었다. 자기 배 아파 낳은 자식을 들을 안아 주기는커녕(남동생 빼고) 욕 세례를 퍼붓는 여자의 삶은 시장에서 상인들에게 사과 하나 더, 콩나물 한 움큼 더, 얻어내는 것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주는 것에는 누구에게도 매우 인색한 엄마는, 시간이 지나 운영하게 된 가게가 잘되어 하우스를 벗어난 다음에도, 그‘성미’는 달라지지 않았다. ‘가난’ 해서 ‘돈’ 이 없어서 못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믿음’과 ‘이해’는 빗나가고 말았다. 돈을 조금 벌게 되면서 엄마의 관심은 오직 돈에 쏠렸다. 버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돈을 쓰는 것은 꼭 필요한 일에도 아까워서 손을 덜덜 떨었다. 학교 등록금을 달라고 해도 들은 체, 만 체했다. 결국 제일 꼴찌로, 반에서 등록금을 안 낸 사람이 나만 남았을 때, 엄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돈을 내밀었다. 그걸 받아 갈 때마다 자존심이 상하고 수치스러웠다.
엄마가 싸준 도시락은 형편없었다. 국물이 넘쳐버리는 김치나, 콩나물, 시금치 등이 한 가지만 대충 담아 놓은 듯 엉망이었다. 초등학교 때 짝꿍이 내 도시락을 보고 나와 밥 먹기 싫다며 “너는 맨날 김치 그딴 것만 싸서 다니잖아”라고 말을 뱉은 이후로, 엄마에게 다른 반찬을 호소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레퍼토리는 뻔해도 너무 뻔했다.
“아무거나 먹으면 되지, 뭘 더 먹으려고 하느냐?”
사춘기가 되어서는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꺼내는 창피함보다 배고픔을 선택했다. 도시락을 아예 싸가지 않았다. 엄마에게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금고가 두둑해진 다음에도 도시락의 퀄리티는 변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하는 일보다 직접 해결하는 게 편했다. 엄마의 주머니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 돈으로 매점에서 컵라면이나 빵으로 점심을 때웠다. 빵조각을 뜯으며 곱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