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껏 흔들려도 괜찮아. 꽃도 흔들리면서 피어난단다.” 누구나 흔들리는 시절이 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날, 더 세차게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다. 흔들리다 부딪치고, 가지가 꺾여도 괜찮다. 땅 아래로 깊이 박힌 뿌리는 깊은 곳으로 퍼져 나가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지탱해 준다. 바람은 지나간다. 거셀수록 빨리 지나간다. 세월은 변하고, 시절이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청춘’이라는 시간은 암흑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어울려 화장을 하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수업 시간엔 키도 작은 내가 언제나 맨 끝자리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교과서를 베개 삼아 잠을 자다 하교를 알리는 종소리에 교실이 시끄러워지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등학교 때, 작은 호프집을 통째로 빌린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다른 지역의 동급생 남학생을 알게 되었다. 첫눈에 호감을 느낀 우리는 두 번째 만남에서 사귀기로 했다.
그 애는 단순히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차원을 넘어선 그 지역에서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소위 말하는 날라리였다. 철없던 눈에 비친 그런 모습은 오히려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지만, 그 애는 내가 순진해서 부담스럽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별을 고해 왔다. 이미 그 애를 잊을 수 없을 만큼 푹 빠져버린 상태였다.
당연히 학교생활은 더 엉망이 되었다. 몇 차례 술을 마시고 전화를 걸어 잊지 못하겠다고 울먹였다. 그 이후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던 그 애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스무 살이 되던 해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그날 새벽, 그 애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허름하고 쾌쾌한 여인숙에서 생각지도 못한 그 애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날 이후, 가장 두려웠던 것은 순결을 잃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미션스쿨에서 혼전순결 서약식에도 참여했었다. 원했던 관계가 아닌 탓에 며칠을 걷기도 힘들 만큼 아팠다. 그 애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애가 밖에서 만나는 게 귀찮다며 집으로 오라고 했을 때도 택시를 타고 그 애의 집으로 갔다. 혼자 집으로 돌아오며 비참한 마음을 꾸역꾸역 눌렀다. 다시는 그 애에게 연락하지 않겠다고 뒤늦은 다짐을 했다.
친구들을 만나 화려한 조명과 쿵쾅거리는 대형 스피커 앞에서 술에 취해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그 모든 것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던 나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결국, 그 애에게서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며칠 후 친구에게서 나이트클럽에서 미팅한다는 연락이 왔다. 별 뜻 없이 그냥 춤이나 추자 하는 마음으로 나갔다.
처음 보는 남자들과 술을 진탕 마시며 춤을 추었다. 그 애 생각이 났지만, 무르익은 분위기 덕에 금방 떨칠 수 있었다. 나이트클럽을 나와 일행들이 모텔로 옮겨 한잔 더 하고 가자고 했다. 피곤해서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잘 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늦은 후였다.
가까스로 모텔을 빠져나왔을 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누군가 짧고, 분명하게 속삭였다.
“넌 더럽혀졌어. 이제 너는 더러운 애야!”
계획에도 없었던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것도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한동안 그런 상황으로 몰아가 버린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아이를 지웠다는 죄책감에 몹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스무 살의 만난 세상은 너무 아프고, 외로운 곳이었다. 시간이 흘러 몸에는 새살이 돋아났다. 하지만, 나의 여성성의 시작은 언제나 그날 차가운 새벽, 쾌쾌하고 더러운 냄새가 나는 여인숙에 머물러있었다. 소녀의 티도 채 벗지 못한 솜털이 뽀송뽀송했던 나의 얼굴은 짙은 화장에 가려졌다. 마음에도 없는 관계를 맺는 진짜 성인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다시 사랑을 시작했다. 누구와도 진실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갖지 못했다. 거짓과 위선으로 자신을 포장하며 상대를 위해 과한 희생을 하다가, 상대가 마음에 차지 않으면 그 즉시 냉소적으로 변했다. 성적인 부분에서는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상대에게 맞추기 위해 연기를 했다. 나의 마음이나 몸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가장 아름답고 빛나야 할 젊은 날들을 도돌이표처럼 무한 반복하며,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를 다른 누군가에게 갚아 주며 살고 있었다. 정작 상처를 받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나와 심장을 나누어 가진 작은 존재가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후, 한바탕 태풍이 지나가 폐허가 된 자리에서 삶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무엇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을까…’라고 던진 짧고 단순한 질문이 삶 구석구석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기 이전까지 발견되지 않은 찬란한 ‘빛’과 그동안 한 번도 깨닫지 못했던 ‘사랑’을 확신하게 되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내가 겪었던 사건의 충격과 공포는 고스란히 마음속 깊은 곳에 수장되어 있었다. 그것이 거기서 영영 떠오르지 않기를 바랐다. 세월이라는 거대한 물살을 타고 떠오르려 할 때면 애써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 세월의 흐름 앞에 이제 나는 한 생명의 엄마가 되었다. 내가 살아온 이 세상을 살아야 할 딸아이를 위해, 더는 차갑고 낯선 곳에 나를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꼭 닮은 또 하나의 나를 위해, 거센 물살을 헤엄쳐 아래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