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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Seoul, Soul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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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 Jang Oct 25. 2024

열 번째 이야기

2023년 초 여름, 올림픽 공원

현정의 머릿속에 지난번,

여러 번 봤던 드라마가 생각난다.  


잠시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

성격,

스타일로 살다가,

여름 바다에서,

휴가를 온 남자랑 사랑을 하고,

이제는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여 주인공은 말도 없이 사라지고,

그러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마주치고,

알고 보니,

지인,

친구,

가족 등등으로

한 다리 걸치면 아는 사이였던,

그 드라마를 보며

현정은,

여 주인공을 참 많이도 응원했었다.


그런데 현정은

성격과 스타일만

다르게 산 게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서로 만났던 장소도 아니고,

한 다리 걸치면 아는 사이로 만난 것도 아니고,  

이 시간에

이 장소에서

그냥 달리기만 했을 뿐인데

마주친다고?


현정은 잠시,

너무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고 당황해서,


이것도 드라마 인가?

지금 드라마 촬영 중인가?

하는 착각마저 든다.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서 있자,

그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다.

현정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그는 다시 현정의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그녀가 더 한 발자국 뒤로 물러 나기 전에,

팔을 뻗어,

그녀를 잡아,

안는다.  


현정이 뒤로 더 물러설 틈도,

왜 이래

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현정이 그의 품에서 나오려 하자,

그는 현정을  더 꼭 끌어안으며 말한다.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자.”


재욱은 그녀와 다르게 보낸 시간과 공간들에서

느꼈을 감정을

서로에게 위로받고,

서로를 위로해 주고 싶다.


그녀는 위로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도,

그래 그러면 그것도 잘됐다

라며 위로해주고 싶다.


그녀를 안는 순간,

그의 안에,

그녀의 체온,

체형,

체취,  

숨소리까지 모두

몸과 마음에 공명되어

위로로 채워진다.


현정에게

그의 조금 빠르지만,

흥분되지 않은,

고르고 간결하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진다.  

어깨를 감싸 안은 그의 팔이

부드럽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의

사랑이 여전히 느껴진다.
 

순간,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든 듯,

두 팔로 그를 힘껏 밀어 내고,

도망 가려 하자,

도망간다는 표현이 맞다.  

그녀는 그에게서 도망쳤고,

그때는 그의 마음에서 도망쳤지만,

지금은 실제로,

그의 눈앞에서 도망쳐야 한다.


가려는 현정의 팔을 재욱은 잡으며 말한다.


“이번에는 안돼.”


현정은 팔을 뿌리치려 하지만,

그는 너무 세지는 않지만,

그래도 도망갈 정도는 아니게,

현정의 팔을 잡는다,

현정이 몇 번 그의 잡은 팔을 뿌리치려 하자,

그가 다시 말한다.


“안 보낸다고.”


그의 말에 현정이 뿌리치던 팔을 멈추고, 말한다.


“놔줘.”

“지금 말고.“

“그럼 언제?”


언제 라니

그냥 놔

라고 말하며,

더 세게 뿌리쳐야지,

언제 라니.


“지금은 가게 놔주고 싶지 않아.”


그리고 그는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며  말을 잇는다.

“질문하지 않을게.”


질문?

무엇을 묻든,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지만,

도대체 무엇을 질문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뭘?”

“다. 지나간 모든 것들.”

“그래서?”

“우리에겐 지금만 있는 거야. 그때처럼.”

“싫어. 난 그때처럼. 그때처럼 있고 싶지 않아.”

“왜?”

“뭐가?”


현정은 그때 도망친 것이다.  

그때 그를 만났던,

그와 함께 했던 그때에서,

도망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도,

그때처럼 있자는 것이다.  

그녀의 지금의 삶에

그가 들어오게 하면 안 된다.  

도망치는 것이 안된다면,

그녀의 삶과 그녀의 시간과 환경 속에서,

그를 밀어내고,

거부하고,

제지해야 한다.


“돌아가자는 게 아니야. 넌 너대로, 난 나대로, 지금 만난 이 순간으로 잠시만 함께 있자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가지 말라는 말이야.”

“그럼?”


그럼 이라니?

이 말 뜻에는 가지 않을 테니,

뭘 할 건데라고 묻는 뉘앙스가 아닌가.

그래도 갈래.

라고 말 했어야지


“뭐가 문제야? 알던 사람들끼리, 우연히 만났는데, 잠시 같이 있는 게 문제가 돼?”


현정이 생각하는 뉘앙스와

재욱의 대답의 의미가 다르다.

그런데 또 그의  말이 맞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때처럼 지금도 현정에게 있다.


“아니.”

“그렇지?”

“내가 문제야.”

“그렇지 않아.”

“네가 그걸 어떻게 단정해.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모른 척하고 싶은 거야? 내가 너한테, 너한테, 그러니까, 너한테. Anyway 그 게 나한테는 문제야. 그러니까 너랑 지금, 이렇게  있을 수 없어.”

“맞아.”

“뭐?”

“네가 나한테 잘못했어.”


현정이 잘못 한건 알지만,

그의 입에서,

너의 잘못이야

라고

직접적으로 들으니,  

마음이



하고 내려앉는다.


그래서

사과라도 해?


그는 현정을 응시하며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아니야. 이유가 있을 테니까. 이유가 없어도 문제는 아니야. 그래야 할 수도 있는 일이 있으니까. 그런데.”


재욱이 말을 멈추자, 현정은 그를 쳐다본다.


“그러니까 물어보지 않는다고. 괜찮다고 말하지도 않을 거야. 나는 괜찮아도, 너는 안 괜찮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나는, 너를 우연히 갑자기, 생각지도

않게 만나서, 반갑고. 반가우니까 잠시 같이 있고 싶은 거야.”

“하지만, 난.“

재욱은 현정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한다.

“괜찮아. 네가 나를 반갑던, 반갑지 않던 상관없어. 그런데 내가 널 만난 걸 반가워하게는 해주면 안 될까?”


 그의 말에 그녀는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사랑한다.

보고 싶었다.

라는 말보다 더 강렬하게

그녀의 마음에 파고든다.


이제 방법은 하나다.  

됐다며

무슨 소리 냐며

뭘 반가워하냐며

말하고

가는 것이다.


하지만 현정은 그에게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반갑지는 않지만,

그를 사랑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고,

늘 생각하며,

떠 올렸으니까.


“그래서?”


현정의 입에서 겨우 나온 말이 마침표와 물음표가

애매하게 섞인,

그래서 이다.


“공원 밖을 좀 나 갈까?

“어?”

“우리 이 자리에서만 그대로 얼마나 있었는지 알아?”

“아.”

“공원 밖에 나가면, 먹을 곳도 있고 마실곳도 있던데,  어디 좀 들어갈까? 나 사실 배도 좀 고파.”


둘은 아무 말 없이 걷는다.


그가  조용해 보이는 작은  선 술집을 하나 발견하고

들어가자,

현정도 따라 들어간다.

현정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한다.  

생각한 들

뭐라 말한 들

지금은 뭐든 맞지 않을 것이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그는 그동안 서로에게,

시간의 차이가 없었던 사람처럼 말한다.


“그냥, 너 먹고 싶은 거 시켜.”

“그럼.”


그가 메뉴를 보더니, 골뱅이 소면 무침과, 파전을 하나 시킨다.


식당 안을 둘러보니,

그렇게 세련되지는  않지만,

조용하고,

왠지 이 동네에서 오래 장사를 한 동네 맛집처럼

보인다.


 남자 직원이 와서 주문을 받자,

현정은 소주 한 병과 맥주 한 병을 달라고 한다.


“소주? 소주도 마셔?”


직원이 소주와 맥주를 가져오자, 현정은 맥주를 컵에 따르고 마신다.

아까 전부터 목이 타들어 가듯이 말랐었다.

한 컵 다 마시고,

다시 또 한 컵 따르려고 하자,

재욱이  먼저 병을 잡고는 현정의 컵에 따라 주고,

조금 남은 양은 그의 컵에 따른다.

현정은 또 한 컵을 마신다.

제이슨은 조금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는다.

마시고 싶지 않고,

취하고 싶지 않다.

현정의 어떠한 행동이나 말 모두

반응하고 귀 기울이고 싶다.


잠시 후, 파전이 먼저 나오고,

골뱅이 무침도 나온다.


현정은 재욱과 마주 앉아,

한국의 선술집에서,

이렇게 한국스러운 음식을 함께 먹을 거라고는 상상도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지금의 모든 시간과, 순간이

당혹스러운데,

맥주 두 잔을 마시니,

기분이 나른해진다.


소주를 들어, 잔에 붓는다.

그 사이 그는 파전도 먹기 좋게 자르고,

소면도 무쳐 놓고는,

현정의 앞 접시에 파전 한 조각과, 소면 조금과 골뱅이 그리고, 각종 야채를 올려 준다.


“마시면서 먹어.”

그의  말에 현정이 피식 웃는다.

“먹으면서 마셔 아닌가?”

“내가 뭐라고 말했는데?”

“마시면서 먹어.”

“응?”

“응?”


현정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잇는다.

“먹으면서 마시는 거나 마시면서 먹는 거나, 같은 말 인가?”


그도  피식 웃는다.


뭔 들 맞거나 틀리거나 무슨 상관인가.

재욱은 그저 이 시간이 놀랍고,

신기하고,

감사하다.

늘 갖고 싶었지만,

갖지 못할 것 같았는데,

뜬금없이 받은 선물 같기만 하다.


현정이 파전을 한입 먹고는 소주도 한 잔 마신다.


어라 이게 왜 안 쓰고 달지.


한 잔 더 따르고, 소면도 한입 먹고는

두 번째 잔을 마신다.


그런 모습을 재욱이 가만히 응시한다.


현정이 말없이 파전을 가져다 한입 먹자,

그도  파전을 한입 집어 먹는다.


재욱은  현정을 바라보고,

현정은 재욱의 시선을 외면하며,

먹고 마시기를 반복하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외면하는 시선도 한계가 생기고,

음식도 술도 어느 정도 떨어져 가자,

현정은 그제야 재욱을 바라본다.


그는 무슨 모나리자처럼,

알 수 없는 엷은 미소를 짓고 있다.


재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좋다.  

지금 현정이 그의 앞에 앉아 있는 것만도 충분하다.


“할 말 있으면 해.”


현정이 겨우 말을 꺼내고는 헛기침을 하자, 그는 물을 건네며 말한다.


“보고 싶었어.”


현정은 마시는 물을 뿜을 뻔했다.


“나도 라는 말을 기대하는 건 아니야. 나는 네가 보고 싶었어.”


현정은 겨우 물을 삼키고는 말한다.

“할 말이 겨우 그거야?”

“응.”


보고 싶다고 말한 게,

하고 싶은 말이 다인 그와,

그런 말을 듣고 무슨 말로 되돌려 줘야 할지

모르는 그녀.


그 둘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흐른다.


잠시 후, 재욱이 천천히 입을 열어 말한다.

“보고 싶었고, 보고 싶었던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있고,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어.”


그의 말이 현정의 귀에,

식당 안에 들리는 음악소리와 함께,

래퍼가 부르는 노래 가사처럼 들린다


보고 싶었고,

보고 싶었던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있고

이 보다 좋을 순 없고


음식 하나를  더 주문해  먹고,

소주를 한 병 더 마실 만큼의 시간이 흐른다.


“할 말 없으면 이제 갈게.”

“이제부터 할 건데.”

“너 지금 장난해?”


현정은 순간

욱함이 나와 버렸다.


재욱은 그런 현정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으면서 말한다.


“너에게 이런 모습도 있었네.”

“할 말 있어도 이제는 하지 마. 나 간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가자,

그도  따라 일어나,

그녀의  핸드폰을 뺏는다.


“이리 줘.”


현정이 달라고 하자, 그는 그녀의  전화기를 들고,

손을 머리 위로 쭉 뻗어,

그녀의 손이 닿지 않게 한다.

현정은 그냥 체념한 듯, 그를  바라본다.


그는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전화기를 꺼내,

계산을 하고는 현정의 전화를 바라본다.


잠금이 되어 있다.

제이슨은 핸드폰 스크린을 현정의 얼굴에 대자,

잠금이 해제된다.


“야. 너 진짜 안돼. 내놔.”


제이슨이 밖으로 나가, 현정의 핸드폰에 그의 핸드폰 번호를 입력하고 전화를 건다.


“로밍해서 왔네.”

“내놔.”


제이슨이 현정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말한다.


“그건 내 한국 핸드폰 번호야. “

“그래서?”

“또 봐.”


현정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한다.

“너 뭐 하자는 거야? 뭘 또 봐. 너 왜 그래? 할 말 있다더니 할 말은 하나도 안 하고, 다음에 또 보자고? 내가 널 왜 다시 봐. 나 그거 안 하려고 너 떠난 거야.”


앗.

너를 떠났다는 말을 입에 담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왜 떠났어?”


입에 담지 말았어야 했다


“그거야. 다 이유가 있겠지.”

“맞아. 이유가 있었을 거야. 그런데 나는 지금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아.”

“그러니까. 중요하지 않다면서, 왜 또 보자고 하는 건데.”

“네가 날 떠난 게 중요하지 않으니까. 널 다시 보는 것도 문제가 없지.”

“문제가 될 건 없지만, 왜 보냐고, 널 떠난 사람을.”


떠났다는 말을 또 하고 말았다.


“음. 내가 제대 한지 얼마 안 됐어. 뭐 한 일 년 정도 돼 가지만.”


생각지도 못한 그의  말이다.


게다가 그 사이 군대를 다녀왔다고?

군대를 드디어 다녀왔네

라고 말할 뻔했다.

그는 그의 군대 문제에 대해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었고,

고무신 이야기도 곁들여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정이 다시 겨우 건넨 말이다.


“회사도 최근에 들어갔고.”


한국에 와서

군대도 다녀오고

그 새,

한국에 있는 회사에 취직까지 했다고?  


정말?

무슨 회사?

미국에서 처럼 ‘IT’ 회사야?

라고 물어볼 뻔했다.


“그래서?”

현정이 또 겨우 건넨 말이다.


“너도 아는 것처럼 내가 미국에서 대학교 졸업하고,  

20대를 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왔잖아.”

“그런데?”


그가  말하는 것을 현정은 도통 이해 할 수가 없어,

이제는 인내심에 한계가 온 거 같다.  


“한국이 낯설어. 성인이 된 나는 한국의 모든 것들이 처음이니까.”


17년 만에 돌아온 현정도,

재욱과 같은 기분이다.


나도 그래

하고 인내심은 한계에 다 달았지만,

맞장구를 칠 뻔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친구가 없어.”


그렇게 말한 그는 창피한지 머쓱하게  웃는다.


그런 그를 그녀는 빤히 바라본다.

도대체 이 남자 뭐길래,

그때도 지금도,  

생각지도 못한 말과, 웃음으로

마음을 휘젓는지 알 수가 없다.


둘이 잠시 말없이 서 있는다.

혹은,

그가 마치 현정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네가 친구 없는 거랑, 나랑 무슨 상관이야.”

“너도 없잖아.”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네가 뭘 알아?”


현정도 친구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명우가 있기는 하지만,

공무원 하느라 바쁜 그와 만날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내가 친구가 없든 말든 그것도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현정의 말에 그는 알 수 없는 모나리자 미소를 다시

지으며 말한다


“집이 이 근처야?”

“뭐라고?”

“집에 가야 하지 않아? 난 내일 출근해야 해서. 너

K 직장인으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지?”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전개 인가?


“가. 그럼.”

“근처면 데려다주고 갈게.”

“됐어. 네가 날 왜 데려다줘, 그리고 내가 너한테 어디 사는지 까지 알려 줄 것 같아?”

“사람을 뭘로 보고. 근처까지만 데려다준다는 거야.

아무리 환해도, 밤인데, 혼자 가기 위험하지 않아?”


위험하지 않다고,

이 동네는 어릴 때 살았던 동네라

익숙하다고

좀 더 높아지고

좀 더 환해진 것만 달라졌을 뿐

내 구역이라고

말할 뻔했다.


두, 세 정거장 정도 버스를 타야 하는 거리지만,

그도  따라 탈것이고,

 같은 버스 안에 있는 것이 더 어색할 것이다.


아니면,

이건 진짜 미친 생각이지만,

버스를 같이 타서 설렐까

라고 현정은 생각한다.


버스가 주는 감성이 또 있지 않는가.


현정은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술 취했거나,

술 취한 미친 사람이거나.


둘은  말없이 걷는다.

상가를 지나, 아파트 사이를 걷자,

그가 말한다.


“미국보다, 여기가 집 찾기는 더 힘들 것 같아. 확실하게 아파트 동 수를 알지 못하면, 이렇게 빽빽한 집들 사이에서 어떻게 찾지? 벨을 눌러 다 확인할 수도 없고.”


그의  말에 현정은 묘한 느낌이 든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말에 뭔가가 있는듯하다.


“너 혹시?”


그가 가던 길을 멈추자, 현정도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본다.


“네가 생각하는 거 맞아.”

“언제?”

“한국에 나 오기 몇 주전에,  2020년도 그 해 여름.”

“왜? 어떻게?”

“그냥 더듬더듬 기억하며 갔어. 미친놈처럼. 그렇게

라도 안 하고 한국 오면 너무 후회돼서 미국에 다시 갈 생각만 하면서 아무것도 못할까 봐.”


미친놈처럼 기억을 더듬으며,

그곳에 그녀를 보려고 찾아왔다는 그의 말에,

그때 그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그는 미친놈이 맞다.  


“그래서?”


현정의 마음과 상관없이

또 겨우 꺼낸 말이

그래서 이다.


“그래서 뭐. 그랬다고.”


재욱은  그녀를  봤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가  말할 때까지 아니면 말하지 않아도,

그가 먼저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정이 조금 더 걸은 후 말한다.


“다 왔어.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기만 하면 돼.”

“그래 들어가. 잘 자고.”


현정은 뭐라 대답할 게 없어,

잘 가라는 듯 손을 흔들고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간다.


뭐라고 말할 것인가.

너도 잘 가.

너도 잘 자.


아니면,

이제 됐으니까 만나지 말자.

이렇게 말해야 하나?
어떤 말도,

적합하지 않고,

유용하지 않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 남자에게는.


현정은 집으로 들어와 불도 켜지 않은 채,

거실 소파에 앉는다.


결국, 이곳에서 이렇게 우연히도 쉽게 만날 사람을

왜 그렇게 멀리

오래 도망쳤는지 모르겠다.


도망 대신

이유를 설명하고

깔끔하게 헤어졌으면

그도 미련을 남기지 않지 않았을까?


그냥 며칠 헤어진 여운에 잠시 아파하다,

잊어버렸을까?


그렇게 헤어졌다면 이렇게 우연히 만났어도,

그냥 스쳐 지나갔을까?


띵동.


문자가 온다.

안 봐도 알 것  같다.  


그는

잘 들어갔지?

잘 자

등의 문자를 남겼을 것이다.


현정은 문자를 확인하는 대신,

화장실로 가 샤워를 한다.


다음 날 아침, 문자를 확인하니,

명우에게 온 문자였고,

주말에 평창에 내려갈지도 모르니,

시간이 되면 놀러 오겠다고 보낸 것이다.


왜 그가 예전처럼 그렇게 문자를 보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을까?

전화번호를 남기고 갔으니,

언젠가는 연락을 하겠다는 것이겠지,

그가 예전처럼 그렇게 연락을 자주

보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너무 지나쳤던 것 같아

왠지, 부끄럽다.


하지만 그가 남긴 그의 새 번호를 차단하고,

옛날 번호도 삭제하고,

그동안 그와 주고받았던 문자도

이제야 삭제를 한다.  

 

[그에게는 그의 삶이 있고, 나에게는 내가 살아가야 하는  삶이 있다  그 두 삶이 교집할 만한 명분이나 이유는 없다. 사랑해서, 오히려, 사랑하니까 떠난다는 말이 더 현실적이고 진실할 것이다. 그래, 그때는 널 사랑해서 만났고, 그리고, 그때도, 지금도, 널 사랑해서 그만하는 거야. 널 만나는 건 나의 욕망과 욕심이야.  나의 사랑을 진솔하고, 순수하게 지키는 건 너와 그만하는 거야.  그것이 나에 대한 양심이고, 도덕이며, 인간답게 절제된, 숭고한 사랑에 대한 헌신이야. 그러니 제발

난 나대로,  넌 너대로, 그렇게 각자의 삶을 가자.]


현정은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양심이니 도덕이니, 희생이니 같은 단어까지 써가며,

도대체 하고 싶은 요점이 뭔지 모르는 글을 노트에

꾸역꾸역 적고는,

노트를 덮고,

자물쇠를 채우고,

책상 서랍 안에 깊이 넣는다.


현정은 몇 개의 노트가 있는데,

하나는 정말 비밀을 적는 자물쇠가 있는

책상 서랍에서 꺼내 쓰고

다시 깊이 넣어 두는 비밀노트가 있고  

다른 하나는  일상생활을 기록하는 노트인데,

그 노트는 주로 침대 맡에 두고,

잠들기 전, 혹은 일어 나서

그날의 일들, 혹은 해야 할 일들을 적고,

감정들을 누가 봐도 괜찮을 정도로 담백하게 적는다.

다른 노트는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쓰는 노트가 있다.


현정은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다.   

지금은 이곳도 떠나,

엄마와 엘레나가 있는

평창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다.


쉼터이자,

쉘터 같은,

그곳.


현정을 본 엘레나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와 현정에게 안긴다.


엘레나는 벨소리가 들리면,

가끔,

“Daddy.” 하며

달려 나간다.

습관처럼.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을 때는 언제 일까.


하기야 현정도,

아직 까지도

받아들이고

이해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엘레나는 짧고 굵게 반가워하고는

뭘 하다 왔는지

방으로


와다다


아이들이 마루 바닥을 뛰어갈 때의 소리를 내며 간다.


현정이 일어나, 지숙을 보고 끌어안으며 말한다.

“엄마. 나 왔어.”

“다 큰 딸이 엄마에게 안 기기는.”

“나도 엄마지만, 딸이야.”

“그래. 그래.”


지숙이 현정을 안고, 등을 토닥 거리며 말을 잇는다.

“배고프지 않아?”

“괜찮아요. 엄마 드시고 싶을 때 그때 먹어도 돼요.”

“오늘은 우리도 늦잠을 자서, 아침을 늦게 먹었어.”


현정이 소파에 눕자,

지숙은 소파 앞 마루 바닥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며 현정에게 묻는다.


“별일 없었고?”

“별일은요”


지숙에게

엄마 있잖아,

사실은 내가 그런 일이 있었는데,

웬일이야.

어제 우연히 딱 만난 거예요.


이렇게 종알종알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명우가 내려 올 지도 모른다는데,

그에게도  말할 수 있을까?

현정 에게나 지금까지 남은 사람이고 사랑이지,

3년이나 지난 사람이지 않는가.


“그냥 학원 가고, 뭐 그랬어요. 주말에 명우가 올지도 모른대요.”

“엘레나가 좋아하겠네.”

“내려오면 다시 연락 준다고 했어요.”

“점심 뭐 먹을까? 국수 먹을까? 야채 좀 많이 넣어서. 골뱅이도 좀 넣고. 엘레나는 간장으로 비벼주고.”


골뱅이 소면 무침이 요즘 유행인가.  

그와도 어젯밤에 먹은 음식 아닌가.


“좋아요.”

“엘레나랑 좀 있어. 엄마 윗집 선생님 댁 좀 다녀올게.”

“네. 엄마.”


지숙은 윗동네에 사는 집과 가까워져

거의 매일매일 오고 가는 사이이다.  


두 부부가 교편생활을 오래 하시다 은퇴하시고,

이곳으로 내려오셨다.  

지숙이 선생님이라 부르는 분은,

지숙보다 나이가 많지만,

둘은 동네 친구로,

같이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산책도 가는 사이다.  


이런 한적한 곳에서,

윗집, 아랫집에 사는,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게다가 성격도 잘 맞으면, 더할 나위 없는데,

지숙과 윗집 선생님은

온화하고 조용한 것이 잘 맞는다.

지숙은,

그 집에 가서 조용히 커피나 한 잔 마실 생각인 것이다.


지숙이 나가고,

한 10분 정도 눈 감았나.


우다탕


아이가 뭔가를 마치고, 허겁지겁 달려오는

소리를 내며,  

달려와 현정의 가슴 위에 눕는다.


현정은 양 팔로 엘레나의 등과 머리카락을

살살 만지자,

좋은지 키득키득 웃으면서 가만히 있는다.


잠시 이렇게 있고 싶다.

엘레나가  금세 지루해하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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