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갈과 마하살이 보연당으로 들어온다. 사울진과 넬은
이미 와 있다.
사울진과 웃날이 한 일을 아직 모르는 넬은 하갈이 들
어 오늘 것을 보자, 특유의 간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
다. “역시나 오래도록 마을 일을 하셔서 그런지, 일 하
나는 정말 잘하십니다. 지난번 마데라 방문도 성공적
이었고요. 라단왕께서 마데라에 한번 방문하시니, 마
을에 활기가 더 생긴 것 같지 않습니까.”
하갈은 못마땅한 얼굴로 짧게 "네" 라고 대답하고, 마
하살은 라단을 보며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오늘은 무
슨 일로 모이라고 하신 겁니까?”라고 묻는다.
사울진도 불만이 있는 듯한 얼굴로 라단 대신 대답 한
다. “그러게요. 두 분은 안 오셔도 되는 자리인데, 왕께
서 부르셔서 오시기는 했겠지만, 글쎄 이 자리에 계셔
야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갈이 몸을 문쪽으로 홱 돌리며 말한다. “그래요? 그
럼 가보겠습니다. 없어도 되는 자리에 오라 가라 하면
서 왜 제 시간을 낭비하게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하갈의 도발적인 말과 행동에 사울진과 넬이 놀랐지만
사울진이 말한다. “하갈님께서는 그렇게 하고 싶은 대
로 말하고 행동하십니까.그것도 왕 앞에서 말입니다.
내 생각은 그렇지만, 왕께서는 또 생각이 있으셔서 부
르셨을 텐데, 물어보지는 못할 망정, 되려 화를 내십니
까.”
“그러니까요. 왕께서 생각이 있으셔서 부르셨을 텐데,
왜 그쪽에서 오네 마네 왈가 왈부 하시는대요.”
하갈은 당장이라도 칼을 빼들어 사울진에게 휘두르고
싶지만, 앞으로의 더 큰 일을 위해 애써 참아 보지만,
아무리 해도 말이 곱게 나오지 않는다.
“뭐라고요? 그쪽이요. 허참 이거 날이 갈수록 말이나
행동이 어찌 이리 가벼워지십니까.”
사울진의 말에 하갈은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은 입을
다무는 게 낫다고 생각하여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아무 말이 없자, 그런 하갈의 모습에 더 화가 난 사울진
이 다시 말을 하려는데, 라단이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한다. “좋은 일이라 같이 계획하려고 다들 모이시게
한 건데, 모두들 불편하신가 봅니다.”
라단의 말에 넬이 웃으며 말한다. “불편하긴요. 모두들
모이셨으니, 그저 담소를 나누시는 것이지요. 무슨 좋
은 일을 계획하시려고 부르셨습니까?”
넬은 왕이 혼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기대가 되어
그러는 것이다. 이제는 더 기다릴 것도 없이 보나 브니
아를 왕비로 밀어 부칠 생각이다.
“혼사 이야기입니다.”
사울진이 혼사 이야기에 얼굴이 환해지며 묻는다. “드
디어 두 분 중에서 결정하신 겁니까?”
“두 분 중에요? 지난번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왕
비가 되고 싶은 이들은 누구나 왕실로 지원을 하고, 시
험을 치른 후, 그중에 합격한 자를 왕비로 맞이하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이를 들은 하갈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왕실의
혼사라,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왕비를 선출하시다니요. 참으로 진보적인 생각입니다.
이 나라의 이념과 딱 맞아요.”
사울진이 손을 저으며 말한다. “누구나 왕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게 어찌 진보적인 생각입니까? 그럼 하
녀를 하던 이도 지원해서 합격하면 왕비가 될 수 있단
말씀입니까?”
하갈이 말한다. “그러니 진보적인 생각이죠. 누구나 왕
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누구나 왕비가 되는 것은
안 됩니까?”
사울진이 하갈에게 다가가 소리를 지르며 말한다. “누
구나 왕이 됐다니요?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하갈도 지지 않고 사울진에게 다가가 말한다. “함부로
말하는 건 제가 아니라 사울진님이시죠. 신분의 높고
낮음이 싫으셨던 거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무슨 지파
에 어떤 가문 사람이 왕비가 되길 바라시는 거예요? 지
금 이 나라에 가문이나 지파가 존재는 합니까? 신분의
높고 낮음이 싫어, 싹 다 쓸어 버리고 세운 나라 아닙니
까. 그런데 왕의 아버지가 되시니 신분의 높고 낮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이 나라에서 누구나 왕비
가 되면 안 됩니까? 그래서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된다
고 차별하시는 거예요?"
하갈의 높아진 언성에 사울진은 할 말을 잃고 잠시 생
각에 빠진다. 지난번 라단이 한 말을 하갈이 들은 듯 그
대로 하고 있다. 둘의 말이 틀리지는 않다. 지금 라파
라는 나라에는 지파도 가문도 없다. 그 모든 것을 하
갈의 말대로 그가 무너뜨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새
나라에는 지파나, 가문 보다 더 높은 자리의 왕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왕비도 이 나라에 걸맞은 이가 돼야
하는데, 누구나 될 수 있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다. 게다
가 왕도 누구나 될 수 있어서 됐다고 말 하지 않는가.
누구나 된 것이 아니다. 라단은 왕이 될 수 있는 자이기
에 된 것이다. 그런데 지파, 가문, 경전의 신의 부름에
밀려, 될 수 있는 자가 왕이 되지 못하니,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그를 왕으로 만든 것이다. 누가 뭐래도, 라
단은 왕이 될 자였다.
마하살이 하갈을 말리 듯, 팔을 잡아 뒤로 잡아끌며 말
한다. “선출된 왕비가 싫으시면, 좋아하시는 분과 하
시면 되지 않습니까? 왕비님도 중요하시지만, 혼인은
사랑하는 이랑 하는 것이 제일 좋지요. 마음에 두신 분
과 혼인하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라단이 건조하고 무거운 어조로 말한다. “마음에 둔 이
는 없습니다. 저는 공식적으로 선출된 왕비를 맞는 것
이 현명하고, 이 나라를 굳건히 하는데 좋다고 생각합
니다.”
하갈이 말한다.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하실 건가요?”
사울진이 잠겼던 생각에서 나와, “그걸 왜 하갈님이
물으십니까? 아직 결정된 것도 아닌데.”라고 톡 쏘아붙
이자 라단이 사울진을 차갑게 노려 보며 말한다. “제가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니, 결정된 것입니다. 오늘 이 자
리는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떠냐 묻는 자리가 아니라, 어
떻게 할지 의논하고자 모인 자리입니다."
라단이 말을 마치고, 옆에 서 있는 왕실 집사에게 눈짓
을 하자, 그는 책상 위에 있는 종이들을 집어 모인 이들
에게 나누어 준다.
“이것을 마을 곳곳에 붙이고, 또한 알리세요. 앞으로
일주일 동안 왕비가 되고 싶은 자의 지원을 받을 것입
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할 일이 있습니다.”
다들 받아 든 종이를 보다가 라단을 바라보자, 라단이
말을 잇는다. “여기 계신 분들 각자 어떤 이가 이 나라
의 왕비가 되었으면 좋겠는지, 어떤 시험을 통과한 왕
비였으면 좋겠는지, 5문제씩 내어서 가져와, 앞에 놓
인 항아리에 접어서 넣으세요, 문제 선별 또한 누가 내
었는지 보지 않고, 시험이 치러지는 날 무작위로 7문제
를 뽑아 출제할 것입니다.”
하갈이 말한다. “좋은 생각이에요. 문제 선별 또한 누
가 낸 것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출제할 수 있겠어
요.”
사울진은 수아와 그때 함께 있던 이들을 죽인 기쁨도
잠시고, 그들의 시신은 없어지고, 나머지 이들은 어디
에 있는지 찾을 수 없고, 게다가 잠잠히 있던 라단은 혼
사를 하겠다고 한다. 도대체 일들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예측할 수가 없으니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뭐라 반대할수도 반박 할수도 없어
답답하기 까지 하다.
사울진이나 넬이 뭐라도 더 말하기 전에 라단은 모임
을 마무리 하고 싶어 다시 입을 연다. “그리고, 참여하
는 이들은 모두 가면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누군지, 아
는 이인지 모르고, 오로지 실력으로만 선출하기 위해
서입니다. 하갈님께서 그날 바로 나누어 줄 수 있도록,
같은 가면을 여러 개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마데라에 잘 아는 옷집이 있어요. 그 곳
에 부탁하면 됩니다. “
“그럼 오늘 모임은 여기까지 하고, 앞으로 4일 동안,
사람들에게 공고를 하고, 여러분들은 문제 출제를 해
서 가져오세요. 4일 후에 모여서, 시험장소와, 방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그리고
이틀 동안 준비를 하고, 7일 후에 시험을 치르도록 하
겠습니다.”
하갈과 마하살이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보연당
을 나서려 하자 사울진이 묻는다. “이게 다입니까?”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저는 이 혼사를 아직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
슨 결정을 하고 일을 하시는 건가요? 게다가 왕실의 중
대한 혼사 일에 왜 저들이 일을 맡아서 하는 겁니까?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입니까?”
사울진의 말에 라단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한다. “누구
의 나라라 물으셨습니까? 누구의 나라라니요? 이 나라
는 제 나라입니다. 그리고 제 나라의 제 왕비를 맞이하
는 일이고요. 여기서 누구의 결정이 가장 중요하겠습
니까? 아. 아버지 시니까, 아버지 로서, 아들의 혼사에
상관하시고 싶으신 것입니까? 이건 아버지 아들의 혼
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걸 원하셨다면, 저를 이
자리에 앉게 하지 마셨어야죠.”
“아니, 이야기가 왜 또 그렇게?”
“아버지가 아닌 신하로서 왕의 말에 따르고 싶지 않다
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 말을 따르고 함께 일할
자들은 많아요.”
“백성들에게는 그리 관대하고 열려 있으시면서 어찌
이 자리에선 그렇게 독단적이십니까?”
“열려 있고 관대한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독단적으
로 나가는 겁니다. 저의 독단이 싫으시면, 백성들을 위
한 열려 있고 관대한 계획을 가져오세요.”
하갈이 사울진을 보고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마하살
과 함께 보연당을 나선다.
하갈이 허리를 구부려 신발을 고쳐 신는 척하며, 층계
옆에 놓인 화분에 라단에게 전할 서신을 숨긴다.
하갈과, 마하살, 라단이 혼인을 진행하는 데는 이유가
다 있었다. 얼마 전 사엘이 하갈의 집을 방문하여, 모든
이야기를 전했기 때문이다.
보연당에서 자세한 계획을 들은 하갈은, 집으로 서둘
러 와, 그날 저녁 비밀통로에 숨어 있는 이들과 놀이방
에서 다시 만나 계획을 나눈다.
“앞으로 7일 후에 왕비를 선출하는 시험을 치를 거야.
그리고 왕비 후보자들은 7일째 되는 날, 사엘이도 가면
을 쓰고, 후보자로 해서 궁으로 들어가면 돼.”
이야기를 듣던 수아는, “왕비 선출이라는 게 신기해요.
그런데 그렇게 갑자기 왕비를 선출한다고 할 수 있어
요?” 라고 묻자, 하갈은 마음이 급해, 그동안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을 깨달아, 이미 몇 달 전부
터 사울진이 왕실 혼사에 대해, 이야기했고 넬의 두 딸
중의 하나를 왕비로 삼으려 했지만, 라단이 왕비 선출
에 대해 이미 이야기 한 적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왕비 선출을 하면, 무엇보다 모든 것을 준비하
는 시간 동안 너네들과 다시 연락할 시간을 벌어 놓기
에 좋을 것 같아.”
수아는, “라단은 우리가 죽은 줄도 몰라요?”라고 묻자, 하갈은 밧세의 손을 두 손으로 잡으며, “너네 들이 와
서 말해 줄 테까지는 나도 몰랐어. 너네들에게 그렇게
한 줄 내가 알았으면 사울진도 지금 살아 있진 못했을
거야.”
밧세도 하갈이 잡은 손을 더 꼭 쥐며 그녀를 바라본다.
수아가 다시 말한다. “그럼 사울진도 우리를 죽인 후
다음에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네요. 게다가
템말 산으로 병사들을 보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하
고 돌아갔어요. 이번 계획이 잘 되면, 우리 모두 마을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럴 거 같지? 안그래? 사
엘아? 사엘아?”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사엘이 수아의 말에 황급히 대답
한다.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었어?”
“아니야. 그냥. 생각은 아니고. 아니 그냥 뭐 좀 생각하
고 있었어.”
사엘은 라단이 혼사를 한다는 소식에 놀랐다. 물론 왕
실의 공식적인 혼사라고는 하지만, 라단 옆에 누군가
가 있을 거라고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런데 왕
비 선출 장소에 그녀가 가면을 쓰고 후보로 들어 가야
한다니, 이 또한 상상도 해 보지 못한 계획이라, 놀랍고
복잡한 마음에 넋을 놓은 것이다.
밧세사 말한다. “왕비 선출이라, 꽤 괜찮은 방법 같아
요. 누구나 왕비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놀랍고, 왕비를
뽑는 방식도 상당히 공정하고 독특해요.”
“너희들이 예전에 같이 지파 일들을 얼마나 잘했니. 사
엘이 너도 사환들을 뽑을 때 그렇게 했잖아. 그냥 가만
히 있었어도 다들 자기 자리에서 잘할 애들인데. 사울
진이 모든 것을 망쳤어. 라단도 많이 변했고.”
“어떻게요?” 사엘이 걱정되어 묻는다.
“저 자리가 얼마나 고통스럽겠니. 그저 날마다 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얼굴이지. 그런데 사울
진은 아들이 왕이 됐다고 좋아하고. “
“마을은 어때요?” 수아가 묻는다.
“너희들이 떠 난 후 비도 한 방울 내리지 않았어. 그리
고 리만투어에서 불어오던 바람도 없어서 마을의 기온
이 올라가, 무덥고, 건조하고 모든 것이 메말라 가고 있
어. 물이 없으니 땅은 여기저기 갈라지고, 농작물 수확
도 적고, 가축들도 가뭄에 죽어 나가고. 게다가 건조하
니까 여기저기 불도 자주 나는 것도 문제고. 라단은 불
을 막고, 농작물을 관리하고, 가뭄과 더위와 질병에 죽
어 나가는 사람들을 수습하기 바빴어. 사람들은 다시
경전의 신이 떠났고 새 나라가 저주받고 있다며 두려
워 하기도 해. 사울진은 그 소문들을 막으려고, 여기저
기 자기 사람들을 시켜, 마을이 이전 보다 살기 좋아졌
다고 거짓된 소문을 만들고 있지만, 모두들 혼돈과 혼
란 속에서 버티고 사는 것 같아.”
하갈의 말에 다들 숙연해진다. 도망간 그들만 고군 분
투 하며 버틴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이것저것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어두웠던
밖이 새벽 동으로 어스름 하다.
밧세가 하갈을 돌아 보며, “엄마. 저는 이제 그들이 있
는 곳으로 가봐야 해요.” 라고 말하자, 하갈이 서둘러
일어나며, “잠깐 있어봐. 뭐라도 좀 싸줄게.”라고 말하
자, 밧세가 하갈을 잡으며, “아니에요. 엄마. 사람들이
눈치채면 안 되니까, 그냥 여기서 조용히 갈게요. 엄마
얼굴 봤으면 됐어요.” 라고 말한다.
“그래도 가는 길에 먹게.”
“아니에요. 우리 여기 곧 돌아올 거잖아요. 그때 맛난
거 해주세요. 할머니 집사님이 제일 잘하시는 연포탕
해주세요.”
“그래 알았어. 조심히 가고. 곧 보자 아들.”
다들 아쉽지만 자리에서 일어난다.
사엘이 말한다. “저는 왕비 선출 일까지는 비밀 통로
안에 숨어 있을게요.”
다들 다시 한번 계획들을 점검하고, 아쉬운 인사를 나
눈 후, 수아와 밧세는 비밀 통로를 통해, 템말산으로
가고, 사엘은 아비갈과 정하, 그리고 그녀의 무사들과
함께 비밀통로 안에 앉아 잠시 눈을 붙인다. 불편한 잠
자리이지만, 하갈을 만나고, 계획들까지 세우니, 마음
이 놓였는지, 잠시 깊은 잠에 빠진다.
라단은 보연당을 나와 늘 그렇듯 밤하늘을 쳐다보다,
주변을 천천히 걷더니, 신발을 보고는 먼지를 터는 척
하며, 하갈이 숨기고 간 쪽지를 꺼내 옷 속으로 숨긴다
궁에 들어온 하갈이 다시 쪽지를 남겨 놓을 거라며, 어
깨를 으쓱하고 보연당을 나갔던 것이다. 라단은 자연
스럽게 보이기 위해 다시 한번 허리를 굽혀, 신발의 먼
지를 터는 척하니, 어느새 왕실 집사가 다가와 말한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분명 모두 물러가라고 했는데 왕실 집사는 남아 있다.
사울진이 심어놓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라단은 왕실 집사의 갑작스런 등장에 놀랐지만 태연한
척, “아니 없어. 신발에 뭐가 묻어 있길래.” 라고 말한
다.
“그럼 저를 시키시지요.”
“다들 물러가라 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 왕실 집
사가 있는 줄은 몰랐네.”
“저는 늘 왕의 곁을 지키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제가
한번 보겠습니다.”
“됐어. 침실로 가서 벗어 놓을 테니, 거기서 봐.”
“벌써 잠자리에 드시려고요?”
“하루종일 왕비 준비로 회의했더니 피곤해.”
라단이 방으로 향하자, 왕실 집사가 따라들어와, 라단의 겉옷 벗는 것을 거들고, 잠자리를 살핀 후, 촛불을
끄고 방을 나간다. 라단은 하갈의 쪽지를 숨겨놓은 가
슴에 손을 대고는 무슨 이야기가 적혀 있는지 궁금 하
지만,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한다. 좋은 소식이기를, 기쁜
소식이기를 바래 본다
라단은 새벽녘에 조용히 일어나 하갈의 쪽지를 펼쳐
본다. 사엘이 남긴 편지이다. 곧 만나자라고 짧게 쓰인
글에서, 그녀의 모습이 함께 보인다. 라단은 쪽지를 가
슴에 대고, 그녀의 꾹꾹 눌러 쓴 글자 하나에서 그녀의
마음을 느껴 본다. 그동안 버텨온 시간들 속에서 느낀,
외로움과 죄책감 그리고 그리움이 사라지고, 그리고
앞으로 사엘과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마음이 기쁨과
희망으로 차 오른다.
잠시 후, 라단은 쪽지를 한번 더 보고, 글자 하나하나
손으로 만져 보고는, 쪽지를 옆에 놓아 화로에 넣고 태
운다. 잘 태워졌는지 확인까지 꼼꼼히 하고는 왕실 집
사가 올 때까지 다시 자리에 눕는다. 모든 일에 조심하
고 신중해야 한다. 그래야 사엘이 안전할 수 있고, 그녀
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으며, 템말산 어딘 가에 있는
친구들 또한 무사히 안전하게 하루속히 이곳으로 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