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보장을 빼놓고 심리상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비밀 보장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구조화 작업이 엉성했던 발령 초기에도 비밀 보장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은 적은 없습니다. 상담 선생님은 상담 중에 알게 된 내담학생의 정보를 누설해서는 안 됩니다. 윤리적으로 그렇습니다. 제가 내담자였던 경험을 떠올려보아도 비밀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심리상담을 하기 위해 상담실을 찾지 않았을 겁니다. 비밀이 새어나가는 상담실을 구태여 찾아갈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상담실에서의 비밀 보장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비밀을 다 지켜줄 수는 없어요. 꼭 알려야만 하는 비밀도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상담실을 찾은 학생 또는 학생 외 타인의 안전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학생의 비밀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학생이 상담 중에 죽고 싶다고 하며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이야기하거나, 가출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하거나, 학교폭력이나 가정폭력 피해를 이야기할 때는 학생이 현재 위험한 상황에 처했거나 곧 처할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겠지요. 학생이 누군가를 공격할 계획을 이야기하거나 치명적인 전염병을 숨기고 있을 때는 타인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발생했을 때는 부모님, 담임교사 등 학생 주변의 주요 인물들에게 학생이 처한 상황에 대해 알리고 대책을 도모해야 합니다.
상담 초기에 모든 이야기를 다 비밀로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설명하게 되면, 상담 중에 어디까지 이야기를 할지 학생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후에 비밀 보장의 예외가 되는 상황에 처했을 때 제가 비밀 보장의 약속을 파기하더라도 학생과의 상담관계가 완전히 손상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의 역할도 합니다. 그러니 학생에게 "네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선생님은 비밀을 지켜줄 수 있으니 솔직하게 얘기해 봐"라고 함부로 장담하듯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학생의 안전을 보호하는 일은 가정, 학교, 사회에서 학생이 만나는 중요한 어른들 모두가 그 몫을 함께 해나가야 하는 것이지, 온전히 저만의 몫이 될 수는 없어요. 그러니 학생이 위험에 처해 있다면 그 상황을 주변에 알리고 다방면으로 학생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비밀보장과 한계점에 대해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부모에게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만약 선생님이 엄마, 아빠에게 이야기를 한다면 다시는 상담실에 오지 않겠다"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기도 하고요. 사정하는 학생들을 보고 있자면 한 번만 눈 감고 지나갈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요. 눈 딱 감고 넘어간 일로 인해서 학생이 더 큰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으니까요. 학생과의 상담 관계가 손상되는 것, 학생이 그동안 저를 향해 보여주었던 믿음을 저버리는 것 같은 느낌, 내담학생에게 미움받는 상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때로 저를 망설이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학생이 상담실을 떠나더라도 궁극적으로 제가 상담 선생님으로서 해야 할 일은 학생의 안전을 도모하는 일이 아닐까요?
학생이 처한 상황을 주변에 공유하기 전에 "네가 방금 한 이야기는 선생님 혼자만 알고 있을 수는 없어. 상담을 처음 시작했을 때 설명했듯이 네가 위험한 상황이기 때문에 방금 그 이야기는 부모님이나 담임선생님께 알려서 너를 도울 방법을 찾을 거야"라고 말합니다. 학생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미리 예고를 하고, 시간을 주는 거예요.
누가 봐도 위급한 상황이라면 비밀보장의 예외 상황에 대한 판단이 어렵지 않을 텐데, 애매한 경우가 있어요. 부모에게 알렸을 때 학생의 상황이 지금보다 더 안 좋게 흘러갈 가능성이 있겠다 싶은 사례도 있고요. 예를 들어 부모와의 갈등이 학생이 자해를 하는 원인이라면, 자해를 했다는 사실 또는 자살을 생각한다는 사실이 부모를 더 자극하고 그것이 또 다른 갈등으로 이어져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겠지요. 실제로 아이의 우울 수준이 상당하다는 이야기를 전달했을 때, 코웃음을 치던 부모를 만난 적도 있습니다. 학생의 자해 소식과 가출 계획에 대해 알린 후에 부모가 같이 죽자고 협박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고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학생의 안녕을 위하는 것일지 기로에 서는 때가 찾아옵니다. 그럴 때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담임교사나 학교 관리자, 슈퍼바이저 등 다양한 의견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함께 고민하고 결정하면 좋겠어요. 혼자서 결정하는 것보다는 위험 부담이 줄어들고, 다양한 의견 속에서 지혜를 모을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