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예 Oct 31. 2024

구원자가 되겠다는 오만

인정과 성취에 대한 욕구가 높은 사람이 초등학교 상담실에서 근무하면서 좌절하게 되는 순간은 다름 아닌 상담자로서의 무력감을 느낄 때가 아닐까 합니다. 상담을 통해 생각만큼 빠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때, 귀를 닫고 움직이지 않는 양육자를 만났을 때, 상담 선생님으로서 내가 더 이상 학생을 위해 뭔가 할 수 없는 상황일 때 말입니다. 


잘 해내고 싶었습니다. 마법처럼 학생을 위기에서 구하는 히어로 같은 상담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현실은 생각과 달랐습니다. 불 보듯 뻔하지만 제가 마음대로 정해놓은 결말과는 다른 방향으로 상담이 흘러가고는 했어요. 그때마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지? 왜 이렇게 무능력하지? 왜 이렇게 못하지?' 하고 좌절했습니다.


무력감에 빠진 제 자신을 건져내려고 논문을 찾고, 법령을 찾고, 연수를 듣고, 자문을 구하며 애써보았지만 영 제 자신이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마법처럼 학생을 위기에서 구하는 히어로는커녕 엑스트라 1 만큼의 역할도 못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자격증 연수를 들으러 간 자리에서 연수를 진행하던 강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선생님은 고작 일주일에 한 시간쯤 학생을 만나시죠. 부모는 일주일에 100시간쯤 그 아이와 시간을 보냅니다. 1대 100이에요. 감히 100시간에 비벼보겠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선생님이 만나는 고작 그 1시간으로 학생을 드라마틱하게 변화시키겠다는 생각은 오만입니다."


그 말을 듣고는 부끄러워졌습니다. 바로 제가 강사님이 말한 오만하기 그지없는 상담 선생님이었던 거예요. 마치 제가 학생의 구원자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그런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상담으로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착각과 오만 속에서요. 상담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해내고 싶은 마음이 컸던 탓이겠지요.


상담은 저 혼자 떠드는 것이 아니라 학생과 함께 하는 것이라서 같은 말을 해도 학생으로부터 돌아오는 역동이 다릅니다. 학생이 가진 성장배경, 역량, 생각과 감정이 개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에요. 내 마음처럼 모든 사례가 다 부드럽게 흘러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좌절하는 날도 많았습니다. 어쩌면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텐데, 그 과정 하나하나가 괴로웠어요. 마치 내 무능력을 확인하는 것 같았거든요. 학생과의 상담과정에서 삐그덕하는 순간이 오면 다시 나사를 조이고 나아가면 그만인데, 삐그덕거리는 모든 순간이 지금 하고 있는 상담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으로 느껴졌어요.


완벽한 구원자가 되어야 한다는 명제 하에 학생을 만났으니 괴롭고 좌절하는 순간이 많았을 수밖에요. 당연하게도 상담 선생님은 학생의 구원자가 될 수 없어요. 학생이 겪는 어려움을 개선하기 위해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요. 유능감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전능감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은 모두에게 위험한 일이 될 거예요. 전지전능한 상담자란 있을 수 없으니까요. 


처음에는 상담만으로 다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소리 내어 이야기하는 것이 마치 '난 이 학생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어요'라는 고백인 것 같아 두려웠어요. 그렇지만 자신의 역할이 가진 한계를 인정하는 것 역시 전문가의 영역이라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지금은 완벽한 구원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명제를 지우고, 학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제는 완벽한 구원자 대신 꽤 괜찮은 조력자가 되어보려고 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학생과 양육자를 돕는 것이죠. 학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학생과 가정의 몫도 있어야 하니까요. 생각해 보면 제가 그들의 몫까지 다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 데다가 그들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몫을 뺏는 격이더군요. 부모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학생은 스스로 가진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새롭게 정의 내렸습니다.


구원자가 되겠다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스스로에게 했던 과거의 저는 늘 초조하고, 답답하고, 무능감에 휩싸이곤 했어요. 지금은 기꺼이 제 역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현실적인 수준으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려고 합니다. 저는 학생의 상담 선생님으로서 학생과의 시간에 최선을 다 할 것이지만, 학생의 모든 순간을 함께 해줄 수는 없고, 제가 학생의 양육자가 되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야 내가 다 해내겠다는 치기 어린 마음이 줄어들고, 조력자로서 담임교사나 양육자, 지역사회 시설 등 학생의 문제에 대해 힘을 합칠 수 있는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더 이상 구원자가 되겠다는 오만을 끌어안고 있지는 않지만,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해서 예고도 없이 채찍질하는 목소리가 제 마음 안에서 들리곤 합니다. 그때마다 괴롭고 어딘가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별 수 없네요.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는 목소리만큼이나 잘하고 있는 지점을 포착해서 스스로를 다독이는 내면의 목소리도 키워봐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사진: UnsplashEsteban López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