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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한 컵, 바람 한 줌, 그리고 햇빛 한 줄기

에필로그

by 히예

얼마 전에 2024학년도 2학기를 마무리하는 종업식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의 한 해가 또 이렇게 지나갔습니다. 겨울답게 추운 날이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정말 끝인가' 하고 종업식 당일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같은 날 강당에서는 6학년 학생들의 졸업식이 있었는데, 졸업식이 끝나고 여러 선생님들과 강당을 정리하다 보니 그제야 '끝났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습니다. 비로소 긴장이 조금 풀리고 깊은 숨이 내쉬어지며 힘을 뺄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잠시동안 상담을 멈추는 이때야말로 연재글의 에필로그를 작성하기 알맞은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상담교사를 생업으로 삼아 일을 하고 있지만 누구나 아는 상담의 대가가 되겠다는 야망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만나는 학생들에게 적어도 해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마음을 가집니다. 상담자 윤리 중에도 '무해성의 원칙'이 있습니다.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취약한 내담자일수록 한 번의 위해가 치명적일 수 있고, 심리상담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려 이후에 다시는 도움을 구하지 않는 결과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명의 인간이 자라나는 과정에 잠시나마 참여해서 일정 부분 그 인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제법 멋진 특권이 아닐까 합니다. 그만큼 말 한마디의 무게를 잘 인지하며 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괜찮은 꽃 한 송이 정도는 피워낼 수 있는 씨앗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와의 만남 몇 번으로 그 씨앗이 곧바로 꽃으로 탈바꿈하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제가 그 씨앗이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물 한 컵, 바람 한 줌, 햇빛 한 줄기, 흙 한 덩이가 되었다면 그것만으로 괜찮습니다. 얼마 전에 한 학생으로부터 감사 카드를 한 장 받았습니다. 발신자는 2년 전쯤 상담을 했던 학생이었습니다.


[... 그 고민을 들어줄 사람이 선생님 밖에는 없었어요. 많았던 고민이 사라지고 다시 행복해질 수 있었어요...]

학생이 다시 행복해졌다니 다행이었고, 그 과정에 제가 바람 한 줌 역할을 했다는 것이 감사하고 뿌듯했습니다. 학생의 씨앗은 아마 싹을 틔우고 자라면서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겠지요.


언제까지 상담교사로 계속 일을 할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천직이라고 느끼며 일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삐그덕거리며 애쓰고 있는 사람이라서 그렇습니다. 상담교사로 일하는 것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기도 여러 번이고, 이 자리가 싫어지는 순간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오늘 만나기로 했던 그 학생이 안 왔으면..!' 하고 바랐던 때도 있고요. 그럼에도 미세하게 변화하는 학생의 표정이나 태도, 학부모와 담임교사의 감사 인사, 스스로 '오늘 좀 괜찮은 상담자 반응을 한 것 같은데?!' 싶은 날이면 어쩐지 입꼬리가 씩 올라갑니다. 그런 것을 보면 상담실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일 자체에 대한 애정이 영 없지는 않은가 봅니다.


새로운 2025학년도를 준비하는 잠시간의 휴식이 끝나면 초등 상담교사로 일하는 일상이 다시 이어지겠지요. 어쩌면 저는 상담교사로서 학교가 아닌 다른 환경에서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사진: UnsplashNora Jane L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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