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을 생각하거나 자해를 하는 아이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아이들이 있다.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자기 몸에 스스로 상처를 입히는 아이들이 있다. 그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도 있다.
6학년 여자아이였던 B는 엄마와 단 둘이 사는 아이였다. 생계를 책임지는 엄마는 늦은 저녁에 출근을 하는 일을 하고 있었고, 외동이었던 B는 엄마가 출근한 이후 시간은 혼자 보내야 했다. 그러다 한 번씩 근처에 사는 외할머니댁에 가서 지내는 날도 있었다. 외할머니는 B에게 "네 엄마의 인생을 망친 게 바로 너"라고 했다. B의 엄마는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하고 B를 낳은 후 이혼을 했다. 할머니는 이혼 후 혼자 힘들게 생계를 꾸려나가는 엄마가 안쓰러워 한 말이었겠지만 그 말이 B에게는 비수가 되어 꽂혔다.
B는 친구관계에서도 갈등이 잦았다. 한 친구에게 유독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 친구와의 사소한 갈등도 못 견뎌하곤 했다. 가족 안에서의 갈등, 유독 좋아하던 친구와의 갈등이 한창 고조되었을 무렵 B는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죽고 싶다는 이야기는 정말 자살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죽을 생각을 할 만큼 마음이 괴롭다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래서 자살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 아이가 한 말의 심각성을 평가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한다.
그중에 한 가지가 "구체적인 방법을 계획한 적이 있는가?"인데, 이 질문에 B는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는지 찾아봤어요. 약을 한 번에 많이 먹으면 죽는다길래 용돈 받은 걸로 게보린을 사서 모으고 있어요."라고 답했다. 게보린을 많이 먹으면 실제로 사망에 이르게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약을 과다 복용하는 것이 몸에 좋을 리 없었다. B가 생각하고 있는 방법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는 몰라도, 꽤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B의 계획을 더 이상 상담의 비밀보장의 영역에 둘 수 없었다.
B와의 첫 상담시간에 비밀보장이 되지 않는 내용(예: 자신과 타인의 안전에 해를 끼치는 의도나 계획을 가진 경우)에 대해서 안내했었다. 그러나 B는 자신이 죽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보호자나 담임교사가 모르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상담의 비밀보장보다 더 우선에 있는 것이 B의 안전이었기 때문에 B의 상황을 B의 보호자와 담임교사에게 알렸다. 그 후 B를 돕기 위한 회의가 학교에서 열렸고, B는 이후 계획한 행동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B의 계획을 외부로 알린 것이 B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으나, 그 이후 B와 나의 관계가 한동안 서먹해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나의 성찰
자살사고나 자해행위를 발견했을 때 궁극적으로 내담자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보호자를 비롯한 주요 타인에게 그 사실을 알리게 된다(가끔 예외적인 상황이 있기는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내담자인 아이가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면, 그동안 맺어온 신뢰관계를 깨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고, 내가 정말 아이를 배신한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마음이 아주 불편해지곤 한다. 그렇지만, 가장 우선에 두어야 할 것은 상담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보다도 '내담자의 안녕'이 아닐까. 내담자에게 미움받는 상담자가 될지라도 상담자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가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믿으며...
F는 자해행동으로 상담실에 오게 된 아이인데, 불안하거나 견디기 어려운 좌절감을 느낄 때 문구용 커터칼로 손목을 긁듯이 상처 내는 행동을 했다. 깊은 상처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F의 손목에는 고양이가 할퀸듯한 모양의 상처가 한가득이었다. F의 행동은 자살을 염두에 둔 자해행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해행동을 할 만큼 아이의 심리적 상태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F의 보호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F의 보호자는 이미 F의 자해행동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걔 그거 관심받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일단 알겠습니다. 바쁘니까 끊겠습니다."
F와 F의 보호자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인지 다 알 수 없었지만, 예상외의 반응에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F의 보호자가 했던 말처럼 관심을 받으려고 자해를 하는 아이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자해하는 아이들을 조사한 자료를 살펴보면 그 비율은 매우 낮다. 자해는 대개 감당하기 어려운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극단적인 방법으로 사용된다. 오히려 살고 싶어서 자해를 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당장은 자살의 의도가 없는 자해행위이더라도, 그것이 반복되고 만성화되면 자살시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손 놓고 두고만 볼 일이 아니다.
F는 졸업 후 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했는데, 출근길에 교복을 입은 F를 만났다. "상담샘!"하고 누군가 불러 돌아보니 F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반갑게 인사를 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F의 손목으로 시선이 향했다. 깨끗한 손목을 보니 최근에 자해를 하지는 않은 듯했다. F도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알아챘는지 "저 이제 안 해요~"하고는 등교하는 중학생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순간 머쓱해졌다가 곧 'F가 조금은 평안해졌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반가웠다.
생각해 보니 F는 지금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는 나이다. 이제 너무 커버려서 길에서 만났을 때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별안간 또 우연히 "상담샘!" 하고 인사하며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주는 F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사진: Unsplash의Brian Patrick Taga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