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과 도전 (Curious & Challenge)
명랑한 에피소드
‘삶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씹을 줄만 알았지 즐기는 법은 전혀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양귀자, 모순 11쪽>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두 부류로 나뉜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보따리가 술술 흘러나와 어떤 주제로든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류,
연령대별로 겪는 보편적인 고민과 지루한 근황을 하소연하기 바빠 대화의 끝이 축 쳐져가는 부류.
이왕이면 생생한 삶의 이야깃거리가 많은 전자의 부류에 속하고 싶다. 전자의 부류에서 대화를 나눌 때면, 빙산의 일각 뒤에 숨겨진 세상에 눈을 뜨고, 마음속에 꿈틀거리던 욕망이 확신으로 바뀌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삶을 풍성하고, 가끔은 천진난만하게 만들며, 타인의 삶에도 자그마한 움직임이 일어나게끔 도와주는 것. 이것이 한 사람이 지닌 에피소드의 영향이지 않을까. 재미의 유무와 관계없이, 그저 하루하루 에피소드가 끊이지 않는다면 그만큼 생기있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에피소드를 만드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필자의 방법은 '여행'이다. 어딘가로 떠날수록, 새로운 에피소드는 각 이름이 붙여져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가는 서랍 한 칸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수북한 서랍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만 골라달라 한다면, '부다페스트 수영장 도강 썰'을 꺼내어 들려줄 것이다.
대학교 졸업식을 마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헝가리'로 떠났다. 헝가리를 시작점으로, 뒤이어 유럽의 다양한 나라와 이집트 여행을 장기간 이어갔다. 세계 여행이 시작된 첫날, 찾아간 곳은 현지 수영장이었다. 여행자라면 한 번쯤은 가 볼 도시의 대표 관광 명소도, 식당도 아닌 현지 수영장. 한국에서 꾸준히 수영을 다니던 필자는 한국의 일상을 이어가며 여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연고 하나 없는 동네 수영장을 검색해 가까운 곳으로 찾아갔다. 부다페스트의 아름다운 공원 '머르깃 섬' 안에 있는 수영장에 도착한 후, 제일 먼저 리셉션으로 향했다. 한국의 여느 체육시설처럼 방문하면 바로 수강 등록을 할 수 있다고 여기며. 그러나, 지금껏 쉽게 여겼던 절차들은 어려움으로 바뀌었다. 몸소 다가왔던 장벽은 '언어 장벽'이었다. 요즘은 대부분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이곳은 헝가리어를 쓰는 헝가리이다. 때문에, 연령층이 높았던 수영장 직원들과 소통하기 어려웠다. 결국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잠시 뒤로 물러났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의자에 앉아 모여있던 학생들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혹시, 여기서 수영 수업을 받을 수 있을까요?”
학생들은 다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모르는 눈치였지만, 이방인을 돕기 위해 노력해 주었다. 우선 선생님을 기다려 보자는 결론에 닿았고, 몇여 분 정적 속에 있다 보니 젊은 여자 선생님이 등장하였다. 언제 이리 사람이 많아졌는지, 여기저기서 나타난 학생들 무리 속에 이방인인 내가 속해 있었다. 선생님께 다가가, 강습에 참여할 수 있는지 여쭤 보았다. 그때, 옆에 있던 한 학생이 통역을 친절히 해주었던 덕분에 가방에 챙겨 온 수영복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우와, 나 정말 헝가리에서 수영 강습을 받네.'
늘 그래왔듯이 수영 전, 샤워하고, 준비운동을 다 같이 하고 들어가겠지 싶었다. 그러나 조용히 나의 샤워기에서만 물소리가 들릴 때부터 이상함을 느꼈다. '어라?' 수영장 문을 열고 들어가니, 준비운동도, 샤워도 없이 모두 이미 물속에 있었다. 한국이었다면 필수였던 샤워 및 준비 운동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리자, 외국에 온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헝가리에 도착한 지 하루밖에 안 된 이방인은 현지인들과 어울려 문화 차이를 제대로 느끼며 시차 적응을 하였다. 발이 안 닿는 수심의 물속에서 시키는 대로 영법을 열심히 행하던 중, 본인의 모습이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신이 나 헛웃음에 실실거렸다. '웃기다, 나의 인생'. 그 순간은 오래전부터 간직한 간절한 꿈의 한 장면이었다. 외국에 살면서 현지 수영장을 다니고, 외국 코치에게 수영 레슨을 들어보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리 속전속결로 꿈이 이뤄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수업을 들으며 조금 당황스러웠던 건 코치의 지도 방식이었다. 한국에서는 코치도 물속으로 들어와 수강생들의 자세를 잡아주고, 직접 보여주며 가르친다. 외국의 코치는 주로 물 밖에만 있고, 큰 목소리로 어떤 영법으로 몇 M를 돌고 와야 하는지 지시만 내린다. 찰나였지만, 만약 이렇게 수업이 진행되는 거라면 강습을 듣지 않고 개인 연습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무튼, 정신없이 수영하다 보니 첫 수업이 끝났다. 하루 끝에 최선을 다해 통역을 해주었던 현지인과 SNS로 디엠을 주고받았다. 오전에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과 레슨 시간은 언제인지, 강습비는 얼마인지 물어보았다. 어째 소통이 이어질수록 동문서답을 하는 듯, 대화의 흐름이 이상했다. 서로의 궁금증과 답의 퍼즐을 하나씩 맞추어 보니, 이상하게 꼬여있던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냈다. 바로, 내가 참여한 강습은 대학교의 수업이었다.
부다페스트 한 대학의 수업 중 일환으로 대학교에서 지원해 주는 수업이던 것이다. 날 처음 본 선생님과 학생들은 필자를 당연히 교환학생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선생님은 질문 하나 없이 수업에 참여시킨 것이다. 당연히 자기 대학의 학생일 거라고 여기며. 재미있던 부분은 아무도 그날의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하기야, 졸업식을 한 달 전에 하였으니. 교환학생이 많은 부다페스트라 더 이질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친구와 난 한참을 텍스트에 웃음만 입력했던 기억이 난다.
세계 여행을 다닐 때, 여러 현지 수영장을 다니며 깨달은 점이 있다. 헝가리를 포함해 대개 유럽의 수영장은 우리나라 수영 시스템과 아주 달랐다. 성인들을 위한 새벽반과 오후반의 수강 신청이 아주 뜨거운 한국과 달리, 이곳에선 어렸을 때부터 수영을 배워야 하는 문화가 갖춰져 있기에, 어린이들을 위한 강습은 자주 볼 수 있지만 성인단체 강습은 흔하지 않았다. 개인 레슨을 듣거나 개인 연습을 하는 성인들만 있을 뿐. 수영 수업을 듣고 싶다는 마음만 가지고 수영장에 찾아갔을 뿐인데, 부다페스트에서 대학 수업을 도강하다니. 한 번도 한국에서조차 도강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이것이 헝가리에 도착하자마자 생긴 잊지 못할 수영장 도강 에피소드이다. 앞으로도 당황스럽고, 웃기고, 때로는 감동적인 에피소드로 빛나는 명랑한 삶을 이어가며, 하루 끝이면 스스로의 삶이 웃겨서 미소 지으며 잠에 드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오늘도 명랑한 에피소드를 만들며 삶을 빛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