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소이 Jun 17. 2023

살아가는 수밖에

산산(山山)이 12화





어때요, 이제 좀 산에 홀린 사람 같아요? 제 이야기를 들으신 소감이 어떤가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몽매한 경우가 많습니다. 과학과 기술만 믿고 자연을 볼 줄 모릅니다. 산도, 바다도, 강도, 땅도 모두 살아있는 존재라는 걸 망각하는 겁니다.


영주 씨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영주 씨가 겪으신 기묘하고 신기한 경험들을 저 역시 겪었던 적이 있거든요.


그러시군요. 그러니 산에 홀린 사람들만 가입할 수 있다는 명목하에 산산이를 운영해오셨겠죠.


네. 지금은 비록 혼자 남았습니다만, 어쩌면 산에 홀린다는 건 삶에 홀린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영주 씨는 아무래도 오백 명의 슬픔을 외면할 수 없어서 그런 꿈을 계속 꿔왔던 것 같습니다. 삶에 홀린 사람들은 그 슬픔을 마음에 담아두고 살 수밖에 없거든요.


삶에 사로잡히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니, 세상이 그런 사람들을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하고 싶고,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해결하고 싶어 집니다.


사람 마음이 그렇습니다. 외면해야 할 일을 외면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한테는 그런 경험들이 계속 달라붙습니다. 거머리처럼요.


맞아요. 저는 살면서 그동안 외면하지 못한 슬픔 때문에 많은 죄책감을 느꼈거든요. 제가 해결할 수 없는 일에 손을 뻗어왔지만,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일수록 주변의 희로애락을 지나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런 마음은 사람을 조금씩 조금씩 좀먹어 결국 병들게 합니다. 삶에 홀린 사람들의 숙명이지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낄 수 있거든요. 산에 있는 나무와 바위에 깃들어 있는 것들, 오랜 세월이 만들어낸 가치와 의미들을 깨닫는 거죠.


할머니가 그래서 뜯어말렸던 거예요. 산에는 유독 슬픔이 많으니까. 축축하게 젖은 음기가 제 명을 갉아먹을까 봐, 늘 전전긍긍이었죠. 그렇다고 슬픔이 죄는 아니잖아요. 슬픔은 결국 인내와 고뇌를 수반하거든요.


생명체를 포용하기 위해서 산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인내해 왔을까요. 갖은 풍파와 역경 속에서도 생명들을 잔뜩 품고 있잖아요. 우리가 산을 사랑하게 된 이유죠. 햇빛이 들어오는 곳은 들어오는 대로 반짝이고 그늘진 곳은 그늘진 대로 어두컴컴하니 그런 조화로움이 우리에게 전달되니까요.


아빠 일도 그렇고... 할머니는 슬픔밖에 볼 수 없었나 봐요. 산에는 슬픔 말고도 기쁨이 있다는 걸 느끼지 못했던 거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열심히 살아서 보여주려고요. 산에는 우리가 가진 온전한 감각에 집중하는 힘이 있다는 걸요.


네. 응원하겠습니다. 영주 씨의 삶은 영주 씨의 몫입니다. 산은 영주 씨 같은 사람들을 홀립니다. 부서져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산산조각 나고, 깨져도, 그 상태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을. 그들은 산과 동일한 에너지 파장을 가지고 있거든요.


바위를 깎는 고통을 겪었기에 고통받은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고,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기에 몇 배의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게 산에 홀린 사람들의 숙명입니다. 공존해야 하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제가 느낀 바로는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경하 씨도, 경하 씨의 숙명을 그렇게 정의 내렸나요.


네. 저는 그냥 그렇게 살아갈 예정입니다. 영주 씨도 그렇게 살아가세요. 언젠가는 알게 되실 겁니다. 영주 씨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요. 분명히 행동하고 있었을 겁니다.


누군가의 얘기를 들어주고, 누군가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누군가를 위해 기부하고... 타인을 위해 행동한 모든 일들은 결국 누군가를 구하는 일이거든요.


그러니 자책 말고 살아갑시다. 영주 씨는 충분히 무언가를 하고 있고 무언가를 할 수 있습니다.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서 거대한 폭풍우를 불러오듯, 저희는 나비효과를 만들어낼 운명인 겁니다. 더 큰 변화는 작은 변화 없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듣고 공감하고 말하며 살아갑시다.


고마워요. 경하 씨. 덕분에 큰 위로가 되었어요.


네. 이것으로 면접을 마치겠습니다. 산산이에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비록 영주 씨와 저 둘 뿐이지만요.


영주와 경하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다. 둘의 대화는 해 질 녘의 금빛 노을과 같아서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아쉬워도 살아가는 수밖에.




이전 11화 오백나한의 전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