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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이 Nov 01. 2020

제 2 장

11. 3월의 함박눈    


눈송이는 마른 길에 떨어져

낙엽같이 나뒹굴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물 위에 쏟아지는 불빛처럼

제빛을 잃어버리고 

차마 부서진 듯    

3월의 눈은 

희미하게 번져가며

그렇게 제 몸을 

조금씩 조금씩 작게 하면서도    

봄의 꽃처럼 

한눈팔 시간도 주지도 않고서

그렇게 빨리도 사라져버렸다.     

이 3월에

잘못 내려온 줄 알고 있다는 듯

그런 것이 그렇게도 부끄러운 줄을

알고 있다는 듯    

꿈속의 연인처럼

덧없는 허무함만을 남긴 채

내게로 오자마자 떠나갔다     

차리리, 오지 않았더라면

눈이라도 뜨지 않았더라면

원망만은 남지 않은 채로

이별은 사랑의 증거는 아니라던

그녀를,

슬픔을 삼키던 그녀와 닮은

3월의 눈이

애달프고 서러워서

나는 한참을 울먹였다    

이제,

겨울이 올 때까지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그렇게,

마음 숨기면서 울먹였다


덧붙임 : 경찰서 민원실 창밖으로 함박눈이 내렸다. 겨울에 못다 온 눈이 내려오는 것이라 여겼다. 난 의심은 했지만,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 눈이길 바랐지만, 한 달이 지난 4월 중순이 시작되고 나서 눈은 또 내렸다. 올 줄, 그렇게 눈치도 없이 한 번은 올 줄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다정한 마음보단 쓸쓸함이 먼저 들었던 건 인정받지 못한 연인을 향한 마지막 몸부림처럼 보였던 이유였다.     

이성은 인간이 사랑에 쉽게 빠질 수 없도록 만든 덫이며 함정이다. 사랑의 실체는 본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식물의 행복이 빛에 있듯, 따라서 어떤 것에도 가려지지 않은 식물은 자기가 어느 쪽으로 뻗어 나가야 하는지 빛의 양과 질을 따져가며 가야 하는지, 기다려야 하는지 묻는 일이 없다. 이 세상의 유일한 그 빛, 오로지 그 빛을 향해 뻗어 간다. 마찬가지로 자기만의 행복을 초월한 사람은 당장 자기가 누구를 사랑해야 할 것인지, 현재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사랑해야 하는지, 아니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랑이 있을까 궁리하고 기다려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계산하지 않는다. 손에 닿는 그리고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랑에 당장 뛰어든다. 이것은 손만 뻗으면 잡히는 그런 사랑이 눈앞에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만, 용기의 부족과 불신으로 진실한 사랑을 해 보지도 못하고 나중에서야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은, 식물에서와 같은 본성이 사람에게는 이성이라는 성격으로 나타나는 데서 오는 특징으로, 계산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와 반대로 미망에 사로잡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유혹에 빠지는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만일, 식물의 본성대로 그 미래를 예감할 수 있는 일이 인간의 사랑에도 적용된다고 믿고만 살아간다면, 일생 단 한 번의 진실한 사랑을 해 보지도 못하고 죽게 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어떤 생명체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해 준 인간의 이성 -, 이것이 바로 덫이며 함정일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사랑은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기에 반드시 그 시작이 있다. 그건 바로, 내적인 의식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자각인 경우가 많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된 결과일 뿐이다. 결과는 부산물이 따르기 마련인데, 그것이 바라고 요구하고 원망하게 되는 본심의 반대로 표출되는 표현들이다. 이미 벌어진 일과 아직 일어나지 않을 일을 비교하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지는 것은 지나치게 방어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다.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마음이 가라고 시키는 길로 가보는 것도 결코 잘못 사는 것이 아님을,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될 선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도 이성과 감성이 밀고 당기듯이 서로 제 역할을 해낸다면 올바르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 손가락은 못생겼다. 특히, 오른손은 더 못생겼다. 글씨를 많이 쓰는 나는 늘 손가락에 굳은살이 있고 잉크 얼룩이 있다. 손을 씻을 때 비누를 잘 쓰지 않아서 잘 지워지지 않는 얼룩은 때론 점같이, 때로는 멍 자국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나의 못생긴 손을 내 모습 어디보다도 사랑한다. 못생긴 줄 알지만 사랑한다. 그 손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내 마음도 사랑하려고 한다.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고 사랑은 관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나는 일어나서, 내 마음을 스스럼없는 달님에서 보여주고 그 진실함으로 또다시 그 앞으로 돌아와 앉아 있다.    



12. 이야기하는 사람    


“다른 사람 이야기 말고, 사소하고 조금은 진부한 이야기라도 좋아요. 당신! 당신만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줘요. 나는 세상 그 어떤 이야기보다 더 즐겁게 들어줄 준비 돼 있으니까요.”    


나 이 한 문장을 쓰기 위하여

커다란 꿈을 꾸고, 헛된 희망을 

마음속에 품은 것은 아니었다.     

나 소박하고 수수한 사람이지만

그 누구의 꿈보다 거의 언제나 

벅차오로고 가슴 설레는 희망을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서

누구라도 마음을 터놓고 얘기 나누면

내 안으로 들어오려고 

그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의 이야기는 언제나

낡은 벽지 발린 작은 방에서 시작됐고

나 이 작은 공간에서 

공손하고도 친절하며 겸손한 마음 되어

이 세상 어디보다도 지금 이곳이 바로

최고의 안식처라고 느꼈다    

작은 창틈을 통과하는 빛

해의 빛이든, 달의 빛이든 

내 작은 손가락을 간지럽히며

어서 원하는 이야기를 시작하라고 

다정하게 달래주는 그 볕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내 손가락에는

하늘의 별과 달과 해와

그리고,

바다의 흰 거품과

그 거품을 닮은 구름과 

비릿한 내음, 그 바람 담겨 있으며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별과 심연은

서로 가장 높고 깊은 곳에서

어서, 꿈 이야기를 해 달라고 

아이같이 성화였다    

내 이야기는 가장 깊은 곳에서

어서 낮은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렇게, 그렇게도

내 손가락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덧붙임 : 집과 가까운 곳에 아이들과 산책을 다녀왔다. 흙길만 걷더라도 마음 들뜨기 좋은 날씨여서 아이들도 내 발걸음도 마냥 가볍고 신이 났었다. 토끼풀 무덤을 지나치지 못하고 나폴레옹의 목숨을 구해준 네 잎 클로버 전설을 이야기했다. 나는 토끼풀 덤불을 뒤져보지 않아도 네 잎 클로버를 아주 잘 찾는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파리가 네 개인 풀은 점점 그 모습이 커지면서 내 눈으로 들어온다. 순식간에 몇 개를 찾았는데 왠지 더는 찾으면 안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건 계속 세 잎 달린 클로버를 뜯어내는 아이들을 보니 어느 날부턴가 행운이라는 말보단 행복이라는 말을 더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었던 이유였다.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이라고 아이들과 나는 꼭 그 행복을 손바닥 안에 가두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 마음속 안으로 들어와 있다는 걸 느끼고, 알고 있다고, 또 너무나 바라게 되면 간절해지지 않아서 그러면 소원해지는 것이, 행복이라 여기게 된 이유에서였다.                                                                                                     

13. 가위바위보    


강물에 내 모습 보여주며

그동안 잘 지냈니 인사하니

내게 너도 안부 묻는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고    

작년에도, 한 달 전에도, 그리고

어제도 너에게로 달려와서

나에게 인사했다    

잘 지내고 있느냐고    

오늘 너는 슬픈 눈에 우는 얼굴

너 좋아하는 가위바위보 내기했지    

내 주먹에 너도 주먹

가위에 가위, 보자기는 또 보

이제 보니, 너는

나만 따라 하는 바보였구나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는

끝낼 수 없는 가위바위보 

그건 너를 향하는 나

혼자만 보고 살던 나

지루하지도 기쁘지도 않은

나와의 영원한 게임    

혼자 한 사랑은 이래서 좋구나

열정 사라져 없어도 지지 않고

생각 없이 해도 최소한 비기는 것    

오늘 나에게 안녕할 때

나는 네가 혼자인 걸 알고 온다    

그러니까, 인사한다

계속 잘 지내고 있어   

  

덧붙임 : 막내 임신했을 때 보았던 영화를 다시 아이들과 보고 잠들던 밤이 생각났다. ‘반딧불의 묘’에서 14살 오빠 세이타는 4살 동생 세츠코와 단둘만 남겨진 전쟁고아다. 끝내 그 둘도 모두 죽는다. 처음 볼 때도 울었지만 그날 밤에도 나는 울면서 잠이 들었다. 그 장면이 너무나 선명하다. 세츠코가 오빠를 기다리는 동안 산속 호숫가 앉아 그 속에 비친 자기와 가위바위보 하던 장면이. 큰아이가 물었었다. ‘저 전쟁에서는 누가 이겼어요?’ ‘전쟁은 누가 이기고 지는 게 없어. 모두가 다 책임져야 할 일을 가지는 거야.’ 내게도 사랑은 영원히 끝낼 수 없는 게임과 같은 것, 책임져야 할 전쟁의 결과라고 여겼다.                                                                                                                                                        

14. 내게 또 다른 장애 – 양파를 써는 것    


양말부터 벗으면 쉬워요

머리핀은 스스로 뺄 수도 있죠    

부드럽고 따뜻하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도

수줍은 티내지도 않고

뽀얀 속내 감추지 못할 거예요    

겁내지 않고 다정하게 들어오면

밀어내지 않아요

하지만, 서툰 당신은 

숨도 안 쉬면서 성급하게도 

너무 가까이 왔다가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네요    

흔적을, 징표로써 

남겨놓고 싶었다는 걸

알고 있어요    

마음은 기쁨으로 벅차오르고

이제 막 행복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왜 눈물이 함께 차오르는 걸까요    

아!

기어이 찌르는군요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내,

흔적은 붉게 물들었어요

징표로 붉은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아픔까지 느끼게 하는군요    

아!

색이란 이렇게 아픔을 주는 것이구나!    

사실 난, 

당신은 나를 만들기에 

꼭 빠질 수 없는 존재라서

만지는 것부터 겁이 났었죠    

하지만, 당신은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맞아들 듯

눈부신 흰빛으로 내 눈 먼저 유혹하고

부드러운 살로 내 손 굳게 만들었어요    

그 아름다움은 

이성부터 마비시켜 놓고 

눈물이 눈을 멀게 하니

찔리게 될 수밖에는 없던 거죠    

이제야 나는,

당신한테서 새어 나오던 

그 투명한 흰빛으로 물들인 마음이

온통 붉은빛으로 번지고 나서야

다시 알게 되었죠.    

아!

색이란 건, 이다지도 아픈 것임을.

   

덧붙임 : 총선으로 평소보다 여유가 있던 아침에 아이들도 나도 좋아하는 볶음밥을 해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볶음밥엔 꼭 양파를 넣어야 제 맛이 났다. 나는 양파를 썰 때마다 그 매운 향 때문에, 꼭 울었고 그러다 딴생각하다 꼭 칼날에 손가락을 베였다. 양파가 빠지면 안 되는 걸 알기에 손가락이 베일 것을 알면서도, 나는 눈물이 날 것을 알면서도 볶음밥을 만들 땐 꼭 양파껍질을 까고 양파를 썰었다. 그것이 없으면 제대로 만들 수가 없는 이유였고 아이들이 그걸 꼭 넣어야 잘 먹는 이유였다.                                                                     

15. 내면의 장애를 극복하는 것 – 교통사고    


눈 내리기 시작한 이른 밤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길가를 

나는 혼자서 걸어갑니다    

시린 얼굴, 곧은 손가락, 뻣뻣한 걸음

내 운명 사라져 버린 그 날의 슬픔보다

오늘 먹은 게 나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푹 꺼져있어 야윈 얼굴보다

텅 빈 뱃속이 지금은 더 서글픕니다

그리고 나는 혼자입니다    

어디까지 이렇게 걸어야 할까요

이제 나는 두 다리가 없거든요    

눈 내리기 시작한 이른 밤, 그날 밤부터

나는 두 팔로 기어 혼자서 갑니다

그 모습, 꼭 걷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나는 혼자서 갑니다.    

가녀린 탓에 내 몸 무거운 줄은 몰랐겠죠

눈 덮인 차가운 그 밤, 그 길가에다

날 홀로 버려두고 싶지 않았단 걸 알아요

당신도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단 걸요

상처받아 괴로운 몸과 마음 알아요    

하지만, 이제 나는 두 다리 없어요

그러니까 눈길, 신발 신고 걸을 일도 없어요    

그날 밤 그때도, 오늘 지금도 

나는 여전히 혼자입니다    

나에게 고통으로 눈물을 준 당신

당신도 가끔 나와 같이 우는가요    


덧붙임 : 밍크, 사향 쥐는 덫에 걸렸을 때 다리를 물어뜯어 잘라내어서라도 자유의 몸이 되고 만다. 가장 절망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지혜의 한 특징이다. 민원요청으로 사무실을 찾았던 오십 대 중반의 남성, 22년 전 자신의 교통사고 조사서류를 요청하려고 찾아오셨던 거다. 그날 나는, 그 남성이 휠체어를 타고 계셨기에 따로 의자를 권해드리지 않아도 되었었다. 솔직히, 그분의 업무를 처리하면서 느낀 것이라면, 현실의 내 형편이나 여건은 삶을 열심히 사는 데 있어서 불만의 대상으로 여겨 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인생 자체는 기쁨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믿음은 우리 삶을 건강하게 이어주는 힘이다. 만일에, 그래서 사는 것에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런 날들이 조금 길게 이어진다면, 어디가 잘못되었나 살펴보고 반성해 보아야 한다.                                                                                                                                                            

16. 그러니까, 지나간 밤에    


이 밤의 한 가운데에서

그대, 이 어둠 안고 천천히 움직이네요

그런 그대 뒤에 서서,

난 작고 투명한 흰 손으로

그대 옷자락을 잡고

이 어둠 끝을 흰빛으로 물들입니다.     

그대는 모르죠

나에게 이 밤이 고독이란 걸

냉정한 그대 때문에

침묵하는 그대 때문에    

하지만,

그런 그대 때문에

별이 빛나는 걸 볼 수 있었어요

고독이 없는 사랑은

한낮 하늘의 별과 같은걸

자정의 별빛을 알아볼 수 없단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어둠이 물러가는 이 밤의 끝은

새벽을 맞는 내 마음 같이도

온통 투명한 흰 빛으로 가득 차버려서

텅 비어버린 것 같아요    

하지만,

고독에 아파 보지 않은 사랑은

열두 시 낮 하늘의 별처럼

사랑의 빛도 알아볼 수 없단 걸

다시 또 알게 되었죠    

그리움의 애절함을 벗어나는 길은

그대를 더 그리워하는 길뿐이에요    

차오른 사랑의 그 먹먹함

숨 막힘에서 자유로워지려면

그대를 더 사랑하는 수밖에는

벗어날 방법이 없단 걸 알아요    

어둠은 눈을 멀게 해서

마음 까지 흔들어 놓지만

내 안으로 스며드는 

이 새벽의 투명한 빛으로 

티끌 없는 사랑의 맹세처럼

이 순간 모든 것이 영원하네요    

다른 소원은 없어요    

눈 뜨자마자, 이런 새벽이면

오늘도 단 한 사람

그대 기쁘게 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간절함은 없어요    

나를 향하던 그대의 속삭임은 

부드러운 선율이 되고

나를 만지던 그대의 손길은

두근대는 떨림으로

한 편의 사랑의 시가 되어

내 마음을 장식해 주는군요    

지난밤,

이 밤이 지나가는 동안,

눈은 감고 입술은 다문 채

사이렌의 침묵의 노래처럼

새벽의 희망은 찾아오네요    

이제 그대를 향한

순진한 내 사랑의 고귀함을

더 소중히 간직할게요    


덧붙임 : 바람은 일주일째 창에다 휘파람을 불면서 혼자서만 신이 난 듯하다. 거의 일 년 만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겠다는 문자가 왔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다가도 이렇게 끝난 게 아니라 끝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내가 예민하고 까다로운 사람이라서 보다 아직은 나 스스로 감추려고 의식적으로 기억해내지 않고 있었던 지난날의 상처가 환멸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나서 나를 힘들게 했고, 마치 돌덩이로 마음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그렇게, 그래서 한참 또다시 마음이 아팠다. 나는 엄마이지만, 아이들은 엄마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니까 그냥 그렇게 내 마음을 안아주었다. 아침이 되고 보니, 불던 바람은 자고 어둡던 구름도 걷히고 따뜻한 볕이 내리고 있었다. 더구나 오늘은 일요일이다. 이 모든 걸 내 편이라고 여기며 나는 괜찮다 괜찮다고 마음을 다독였다. 우리에게는 현재의 인생에 불만을 품을 어떤 권리도 없다. 인생에 도무지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모든 것에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만 알면 된다. 그러나 그 만족의 실체가 현실의 상식에서 오는 완전성과 완전히 부합되는 기준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 나 중심에서 나오는 신뢰를 유지하는 힘이 있다면, 그 별개의 기준이 바로 인생의 균형이다.                                                                                                                                                             

17. 그림자    


시작할 때는 너를 알아보지 못했다

네 모습 보이지 않았으니까

시간이 갈수록 너를 상관하지 않았다

네 모습 차라리 밟고 갈 수밖에는    

무슨 수를 써도 나는

너를 피할 수 없었다

너에게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런 맘 알고 있는지, 너는

내 모습 앞질러 걸어갔고

내 뜻과는 다른 나의 마음은

너를 계속 따라 걸어갔다    

너를 따라갈수록

붙잡고 싶어서 

더 빨리 걸을수록

너의 모습 희미해지고

조금씩 가라앉던 그 저녁

어둠을 따라가던 그 날의 밤

너는 이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너를, 지금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기다리는 나는 지금, 오늘 밤

아침 해 기다리는 오늘 밤

그래서 너 때문에 잠 못 이룬다    

그 아침에, 너를 내가

순간이라도 놓칠까 봐서

조금도 놓아주기 싫어서

잠 못 이룬다    

너는 여전히 보고 싶다    


덧붙임 : 모두가 잠든 시간 깨어 해가 뜨는 걸 지켜보는 사람은 온종일을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지낼 자격이 있다. 날이 밝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 그걸 깨고 깨어난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이며, 그 용기를 지닌 사람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기쁨의 정당한 자격의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18. 그대 때문에    


그대!

나를 바라보면 안 돼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 

보여드리기 싫어요    

나는 그대 대단히 사랑하고 있어요

그대도 나 사랑한다고 했지만

내 말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죠    

그를 당기는 다른 소리에 

마음 맞추는 거라 생각했어요    

나는 때때로

나같이 보채지 않던 그대가

화나기도 했었죠

비를 내리지 않는 구름처럼요    

어린아이처럼 나는

참았던 눈물 터트리고야 말았어요

하지만, 울고 난 뒤에야

마음 가벼워지는 걸 알았어요

비를 내린 구름처럼요    

그대가

내 마음 전부 못 본다는 게

이제는 다행이에요    

말로 다 하지 못하는 것을

차라리 그대가 모를 테니까요    

그대! 

내 마음 다 볼 수 있다면

더 없을 사랑의 속삭임으로

그대의 눈과 마음 괴롭혔을 테니까요    

이제, 파도처럼 한 번만 숨 쉬고 말할게요

찬바람에 온몸 젖은 채

아침까지 달려오는 파도처럼

불평하지 않는 나 되겠어요    

이제, 그대가 불평하면 안 돼요

나 바라던 온전한 그대가

이렇게 안아주고 있는데

나 무슨 말을 또 할까요    


덧붙임 : 일어나기 싫은 새벽이었다. 모든 하루의 시작, 새벽 시간이 여유롭다면 그 하루 전체가 이미 정해진 것의 두 배 넘치도록 느껴지지만, 오늘 아침에는 일찍 눈을 떴는데도 이불을 박차고 나올 용기가 없었다. 우선 잠들기 전 두통이 새벽까지 이어졌다는 점, 날씨가 풀리지 않고 이상하게도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내 마음이 무엇도 열심히 서두르기 싫어 일상의 부지런함에서 외도해 보고 싶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 시는 변명이다.                                                                                                                            

19. 기다림    


너는, 밤처럼 계절 따라

조금씩 더디게 왔다가 서둘러 갔다    

그래서 나는, 늦봄의 새벽하늘

그 끄트머리 아래 앉아서 

겨울밤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밤을 기다린다는 건,

늦었더라도 어김없이 찾아와 준

기대의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기약이 없던 너처럼

이제 이 밤도,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계절이 변해가듯,

너도 어쩔 수 없었는가 보다     

꺼져가는 새벽 별 깜빡일 때

그래서 나는, 

딱 한 번 울었다    


덧붙임 : 차라리 잘 된 것이라 여기며 산다는 것은 나 스스로에 자유를 부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나는 나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가장 힘이 센 사람이므로 그렇게 조금씩 한 가지씩 지우고 채우면서 자유로워지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이제는, 이렇게 밤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 그 밤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임을 알게 되었다.                                                             

20. 내 문장 속 너  

   

물속에 작은 얼굴 담그고 눈뜨면

밤하늘에서 본 별 볼 수 있었다    

물속 작은 모래알은

5월의 초저녁, 서쪽 하늘 금성처럼 

해가 진자리 차지하고선

땅과 경계가 무너진 어둠 오기 전에도

별처럼 환한 환상적인 너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토록 기다렸고 그립던 너였거늘,

물속에서 뜬 눈으로 만난다는 건,

숨을 참고 눈에 들어온 모래알 때문에

오래도록 너 보고 싶던 내 마음

참았던 숨처럼 물거품 되어 

물속 경계를 사라지게 하고선

빛도 없이 소리도 없이 

울림만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너를, 너무나 

오래 참고 있었나 보다    

바람조차 불지 않던 날엔

너는 5월의 볕처럼 단단해져 

그 아래 서 있던 내 그림자조차도

흔들지 못했었다    

너의 평온만 보았던 나는,

누구도 몰랐던 네 요동을 알게 된 내가,

이제야, 온몸으로 너를 끌어안고서

내 사랑이라 믿게 된 그 날부터

밤 깊어질수록 초저녁 금성은

마치 너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어제 나에게 입 맞추던 너는 

스스로의 네가 아니라

내 안에 가둔 또 다른 나였다는 걸,    

아!

차라리 너를 알아보지 않았더라면......    

너는 시간마다 나를 찾아와서

저 높은 산만큼의 먹을 것을 주면서

네 안의 나를 키우는 것이,

그것이 너의 유일한 기쁨이며

슬픔을 이기는 유일한 한 가지라고 했었다    

하지만,

날마다 밤은 돌아와도 

내 속의 너는 돌아오지 않았기에

물속에서만, 아픈 눈으로 너를

만나 볼 수밖에는 없었다    

그날 너는,

혼자만 알고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

입맞춤 해버리고 사라져버렸다    

그날부터 나는

그곳, 그 시간 떠나지 못했다    

너를 못 견디게 사랑하니까

나는 알고 있으니까

나에게 다시, 이 자리로 올 거란 걸

돌아오지 않는단 두려움은 없었다    

창밖, 창백한 안개는

그날 네가 나를 끌어안듯

전부를 보듬는 이 새벽,

나는 너를 물속에서 꺼내주고

내 앞에 앉히고 입술로 맞는다    

그러고 나서는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만 말한다    

잉크 얼룩진 가는 손가락 사이 펜 가두고

물속에서 꺼낸 너를, 이제 다시

내 문장 속에다 가둔다    

나는 너를,

사랑할 수밖에는 없다고.    


덧붙임 : 인간은 자기의 죄과에 대한 신의 응징과 고난을 통하여 지혜에 도달한다. 그런 순간이야말로 인간 정신의 위대한 성취다. 제아무리 짙어도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걸, 한 번이라도 새벽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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