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왜 불안을 느끼는지 여러 요소를 꼽아 분석하고,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개인이 어떠한 노력을 할 수 있는지 상세히 설명해주는 책이다. 사람이 불안에 떠는 건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이치다. 게다가 현대 사회에서는 미지의 요소가 많다. 지나치게 많다. 게다가 불안을 느끼는 상황 속에서 자기객관성을 갖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이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소용돌이에 끌려 퍼드덕 대고 있는 걸 지나가는 사람이 밖에서 보면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허우적 거리는 걸까 싶지만 실제로 허우적 대는 사람은 죽을 둥 살 둥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겠다. 소용돌이 속에서 방향을 잃고 있는 와중에 '오, 저는 지금 이러이러한 기제로 불안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만 불안을 감경 시키기 위하여 저러저러한 노력을 해보겠습니다.'라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혼돈 속에서는 뭐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은 여기서 하나의 선 그래프를 제시한다. 그 선이 의미하는 건 사람의 행복 지수다. x 축은 소유와 성취 수준을 나타내고, y축은 행복 수준이다. 무슈 보통은 우리가 상상하는 만족감은 소유와 성취 뒤에도 지속해서 높은 선상에 머무를 거라고 여기는데, 현실에서는 소유와 성취와 함께 행복감은 고점을 찍고 그 이후에는 순조롭게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무슈 보통의 친절한 설명에 토를 달 생각은 없다. 몇 번이고 당했다. 이 산만 넘으면 난 행복을 거머쥘 수 있다는 굉장히 비합리적인 관념. 사실은 첩첩산중인 것을 몇 번씩이나 속아 넘어간 뒤에야 깨달았다. 지금까지도 머리로는 행복의 단기적 지속성을 알고 있음에도, 가슴으로는 받아드리기 힘든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건 내가 아직 덜 당해서 그런건지, 지나치게 낙관적이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다. 주로 입시, 고시 같은 입문 과정에서 그런 상념에 휩싸이고는 했다. 굳이 따져보자면 그렇게 목매야만 하는 것들은 아니었다. 졸업장이 대수고, 자격증이 뭐라고. 그렇지만 그 당시의 좁은 시야에서 반드시 거머쥐어야 할 메달이고 트로피로 보였고,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있다고 한들, 내 시야 너머에 있어 없는거나 다름 없었다. 과정이 개인에게 너무나 지난하니 그 이후에 누리는 만족감은 반드시 오래 가야만 한다는 일종의 심리적 강박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고점을 찍기 직전의 상황에서 느끼는 기쁨의 맛이란 더없이 달콤하다. 거사를 치루기 전에 터지는 도파민, 결과를 알기 전 불태우는 행복 회로, 롤러코스터가 떨어지기 전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아드레날린, 여행을 떠나기 전 느끼는 설렘 같은 것들. 더 강렬한 감정은 실체를 접하기 직전에 맛볼 수 있다. 정작 과업을 행하는 도중에는 그 이전의 강렬함에서 한데 희석되어 묽어진 결따라 흘러간다. 가장 높은 지점에서는 모든 게 내 발 밑에 있으니, 다시 땅 위를 딛기 위해서는 내려갈 수 밖에 없다. 원상태로의 회귀는 추락이다.
추락이라는 단어마저 어쩐지 극단적인 면이 있다. 회귀의 과정을 여태 즐겁게 보낸 기억이 없는 걸 어쩌겠나. 이건 앞으로의 숙제다. 추락으로 온 몸이 으스러지고 산산조각 나는 상상을 할 때가 있는데 상상을 하면서도 상상고통을 겪는다. 그러니 고점에서의 행복마저 온전하게 기쁘지 않다. 그 뒤에 이어질 건 추락이라는 걸 알아서 그렇다. 나만의 행복의 공식은 기쁨과 만족감 한 꼬집과 불안 및 두려움이 한 다라이다. 무슈 보통이 행복의 선 그래프를 제시하면서 우리 현대인은 이런 이유로 불안한 것이다, 라고 짚어 주었을 때 나는 이미 알아요, 그럼 어떻게 해요, 라고 되묻고 싶다. 내가 탄성 가득한 고무 풍선이었으면 좋겠다. 무게도 가볍고, 통통 튀어 오르는. 그래야 추락해도 다시 튀어 오를 수 있을텐데. 결론은 이렇다. 앞으로 추락을 즐기는 방법을 연구해야 겠다. 추락에도 나름의 아름다움은 있겠지,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