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맑음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는 틈 사이로 햇빛이 들어온다.
지난 몇 주동안 끊임없이 내린 비 때문에 아침이 와도 흐린 구름 사이로 미약한 빛이 한 두 줄기 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은 희한하게도 오래간만에 화창한 날씨다.
지금은 아침 일곱 시, 완전히 기상하기에는 조금 이른 감이 없잖아 있는 애매한 시간이다.
하지만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다음번에 눈을 뜨면 아홉 시가 될 거라는 걸 나는 안다.
알면서도,
그걸 알지만.
아침 9시 20분.
그럴 줄 알았다.
결국 9시를 넘겨서 침대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방의 블라인드를 걷는 일이다.
블라인드가 커튼이 아닌 철제 가림막이어서 내리기만 하면 어느 시간대고 거의 모든 빛을 차단시킬 수 있어서 위험한 존재기 때문이다.
슬리퍼를 신고 기지개를 켜며 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데 옆방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옆방 이웃 톰이 청소기를 돌리는 모양이다.
게다가 가구 끌리는 소리까지 사정없이 들리는 데다가 방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가보니 톰의 방 앞에 잡동사니가 마구 꺼내져 있다.
웬만한 대청소가 아닌 건 확실히 알겠다.
어제 톰의 여자 친구 테레사가 놀러 왔는데 아무래도 대청소 인력을 더 충당하기 위한 계략이 아니었나 싶다.
밖에 꺼내져 있는 품목 중 희한한 모양의 운동기구가 눈에 들어온다.
서너 개의 큰 물통을 쇠붙이 양쪽 끝에 매단 조립식 바벨? 설마.
내가 멀건히 핸드메이드 바벨을 바라만 보고 있자 그새 테레사와 톰이 아침 인사를 한다.
“뭐야, 저건.”
실소를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 바벨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파들파들 떨린다.
“내 운동기구지.”
슬리퍼를 신은 발로 바닥에 놓인 바벨 끄트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는 톰은 어쩐지 위풍당당한 수제 운동기구의 존재감에 퍽 자랑스러워 보인다.
“물로 하니까 그렇게 안정감이 있는 거 같지 않아서 다음에는 저 통을 모래로 채워볼까 해.”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하는 말이 나름대로 저만의 논리를 갖고 있다.
물이 너무 유동적이어서 자꾸 무게 균형을 맞추기가 힘들다, 그러니 안을 모래로 바꾸면 아마 들고 내리기가 훨씬 수월해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소리였다.
테레사는 톰의 구부정한 어깨와 곱슬머리를 내리 쓰다듬고 바벨을 뛰어넘어 부엌으로 건너온다.
톰을 등지고 선 테레사는 얼굴을 구기면서 눈썹을 으쓱 인다.
쟤는 도대체 왜 저럴까, 하는 얼굴.
나도 어깨를 한껏 끌어올려 답했다.
톰이 그렇지 뭐, 하는 몸짓.
오늘의 아침, 이 아니라 브런치는 이와 같다.
마트에서 산 미트볼을 마늘과 함께 올리브유에 구운 뒤, 조각낸 고다 치즈를 올려 녹일 것.
나는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의 소스 인간이라 케첩, 갈릭마요, 바베큐 소스를 다 꺼내 그걸 찍어먹을 참이었다.
마늘을 종종 썰어 프라이팬에 던져놓고 그 사이에 동그란 미트볼을 손으로 눌러 납작하게 모양을 만들었다.
엊그제 톰과 테레사가 고기볶음으로 미트볼을 만들어 락앤락에 담아줬는데 그게 어찌나 맛있던지 먹으면서 눈물이 조금 났다.
그에 영감을 얻어 오늘은 내가 직접 만들어볼 야심 찬 계획을 세운 것이다.
마늘이 타면서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완벽한 요리란 없는 거야, 늘 배우고 발전하는 거라고.
겉면이 거무튀튀하게 변해가는 마늘을 빠르게 건져 올리는데 복도를 지나가다 부엌에 빼꼼 고개를 내민 톰이 한 번씩 웃는다.
뭐, 자식아. 네가 뭔데 내 미트볼을 평가해.
유리잔에 얼음 네 개를 동동 띄우고 포도주스를 한 잔 가득 따랐다.
다른 그릇에는 작은 수박 반쪽을 먹음직스럽게 잘라 넣었다.
납작한 그릇에는 미트볼을 보기 좋게 나열하고 그 위를 조금은 그을린 마늘과 고다치즈 조각을 올려놓는다.
쿠쿠에서 밥을 한 주걱 퍼고, 모든 식기와 그릇을 제자리에 정렬한다.
아, 이 맛이지. 행복이 별건가.
시침은 11시를 조금 비껴지나가고 있다.
바깥 날씨는 맑고, 공기는 74%의 습기를 머금고 있다.
4m/s로 부는 바람이지만 온도가 16도 언저리를 맴돌고 있어 얼굴에 닿을 때 산뜻하다고 느껴질 알맞은 선선함이다.
바깥 신호등은 아직도 불빛이 고장 나 반만 들어오고 있고, 아래 블록 공사는 끝나기 한참이 남은 것 같다.
건너편 잔디밭은 여전히 푸르고, 작은 광장 옆 레스토랑은 점심시간이 되니 사람들이 줄 서서 음식을 포장해 나간다.
오랜만에 볕 좋은 리스본의 금요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