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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림 Oct 21. 2021

나의 산타 할머니

<할머니의 사계절> 



스무 번의 겨울을 할머니와 보냈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나름 교회를 열심히 다녔지만 그런 어린이에게도 12월의 산타 할아버지는 지나칠 수 없는 법. 못해도 다섯 해 정도, 할머니와 나는 성탄절과 예수님과 크리스마스와 산타를 모두 기념했다.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산타 할아버지를 믿든 안 믿든 일단 그가 착한 아이에게 준다는 선물은 기대해보는 거였으니 말이다.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남은 어느 해였다. 아랫목에 앉아 있는 내게 할머니가 물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뭐를 줄꼬?" 

사실 할머니가 질문을 하기 전부터 올해의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 때문에 좋은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가능한 것을 선택하기에 익숙해져 있는 어린이였다. 할머니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나 또한 만족할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싶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고른 것은 문구사에서 파는 20색 고무찰흙이었다. 슬라이스 치즈처럼 생긴, 투명 비닐을 떼내면 납작한 색색의 찰흙이 나오는 그 고무찰흙 말이다. 납작한 고무찰흙은 동그랗게 뭉쳐보면 생각보다 더 작은 양이었지만 여러 가지 색이 들어있어 다양한 것들을 만들 수 있었다. 

할머니에게 몇 천 원을 받아 소중히 들고 집에서 2분 거리에 있는 문구사에 갔다. 고무찰흙을 사 와서 기쁜 얼굴로 할머니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 해 겨울에는 무엇을 만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노란 장판 위에서 손녀의 겨울을 보듬던 할머니와 20색 고무찰흙만 사진처럼 남아 있다. 


산타 할머니의 하나뿐인 루돌프로서 나 또한 겨울마다 하는 일이 있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면 평소 할머니와 갈등이 있던 옆집 건강원의 빨간 벽돌담에 눈을 뭉쳐 던지는 것이었다. 꼬마였던 나는 무슨 일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할머니가 옆집 건강원 아저씨 때문에 속상해하는 일을 여러 번 보고 함께 아저씨를 미워하게 되었다. 우리 집의 것보다 튼튼하고 높은 옆집 건강원의 빨간 벽돌담에 눈을 던지는 건 아무도 몰랐을 내 소심한 복수였다. 하루는 EBS 겨울방학에서 흰 눈에 물감을 섞어 색색의 눈을 만드는 것을 보고 유레카를 외치며 똑같이 따라 했다. 그날 산바람건강원의 빨간 돌담은 형형색색의 작은 눈 뭉치들로 뒤덮였다. 


손끝이 얼얼하게 놀다 들어오면 할머니가 아랫목 깊이 숨겨둔 밥 한 그릇을 꺼내왔다. 할머니는 겨우내 흰쌀밥을 스테인리스 밥그릇에 수북이 담아 아랫목에 넣어두곤 했다. 철없는 손녀는 뜨끈한 은색 밥그릇만 생생하고 할머니 앞에는 무엇이 놓였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매 끼니 찾아왔던 나의 산타 할머니. 우리의 겨울을 붙잡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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