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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Sep 04. 2023

'몰라' 할머니와 '엄마 엄마' 할머니

월요일이 되자 금요일 저녁에 '척추 시술'로 입원했던 젊은 환자들은 모두 퇴원하고 병원 직원들은 새로운 환자를 맞이하기 위해 침상을 정리하고 카드를 새로 끼우며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주말부터 조무사분들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타고 내리는 연습, 화장실에 혼자 가는 연습을 시작했다. 왼쪽 발끝부터 허벅지 위까지 다리 전체를 붕대로 휘감고 지지대까지 받치고 있어 다리를 굽히지도 돌리지도 못하는 상태지만 양팔과 어깨, 오른쪽 다리를 지해서 휠체어 타고 내리는  잘해도 기본적인 것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겠다 싶어 힘든 장애물 하나를 뛰어넘은 듯한 성취감마저 들었다. 


171cm의 큰 키에 유난히 긴 나의 하체는 많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했지만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하는 처지가 되어 보니 '다리가 길다는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쭉 펼치고 있는 긴 다리가 벽에 닿아 세면대 바로 까지 가깝게 갈 수도 없고, 화장실에 드나들 때도 긴 다리가 벽에 부딪혀 여러 번 움직여 각도를 맞춰야 하는 수고로움을 감당해야 한다.


'내가 20대 때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있는 걸까.'

당시 나에게 호감을 갖고 접근했던 남자들 중 단신(身) '아담 사이즈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노골적으로 '숏다리(짧은 다리)' 혹은 '요롱이 (유난히 상체가 긴 체형)'로 부르며 은근 무시하거나 '감히 너 같은 게 어디 나를 넘 봐?' 자만하며 일부러 높은 하이힐을 신고 눈을 깔아서 내려 보며 그들의 기를 꺾어놓곤 했다.


지금 이 상황이 되고 나서야 좋은 게 마냥 좋기만 한 것도,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조건이 무조건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장단점의 기준은 '상대적'일 뿐 결코 '절대적'이지 않고 상황에 따라 장점이 단점이 될 수도 단점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거 일 텐데 이제야 알게 된 게 새삼스럽다.



늦은 오후가 되자 새로운 환자들이 병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들리는 목소리만으로 추정해도 연세 많은 노인분들이라는 게 짐작되었다.

내 옆 침대를 쓰게 되신 할머니와 간호사와의 대화가 커튼을 통해 들려왔다.

"할머니, 키 하고 몸무게가 얼마예요?"

"몰라"

"재 보신 적 없으세요?"

"몰라"

"혈압약 드시네요?"

"응, 저혈압 때문에."

"고혈압 약인데요."

"아냐, 저혈압이야."

"전에 수술하셨던 적 있으세요?"

"몰라"

"없으세요?"

"몰라"


모든 대답을 '몰라'로 일관하시는 할머니.

젊은 간호사도 포기했는지 '제가 아드님께 전화해서 직접 물어볼게요.' 하며 병실을 나간다.

나도 모르게 쿡쿡쿡 웃음이 나왔다.


또 다른 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이동식 침대에 실려 병실로 들어온다.

환자는 내 앞의 침대로 옮겨졌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음성만 들어도 연세가 많은 분인 듯한데 '엄마 엄마'를 연발하며 '엄마'를 찾으니 간호사와 조무사들은 결국 참던 웃음을 터트렸다.

"할머니, 왜 이렇게 엄마 엄마를 찾으세요?"

"엄마 엄마~"

나이와 상관없이 몸이 아플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언제나 '엄마'인가 보다.


앞에 할머니는 침대에 자리를 잡고 나서 좀 안정이 되셨는지 더 이상 '엄마 엄마' 하며 엄마를 찾지 않으셨다.

조용한 할머니의 기도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이젠 제발 저 좀 데려가 주세요. 너무 힘들어요." 기도를 하시는 음성이 너무나 간절했다.

'얼마나 힘드시면...'



커튼을 열고 일어나서 휠체어에 주춤거리며 앉는데 앞에 '엄마 엄마'할머니께서 나를 보고 웃어 주신다. 100세를 훨씬 넘기고 건강하게 장수하시다 돌아가신 외할머니 모습과 너무 비슷한 모습이셔서 놀랐다.


"댁도 허리가 아푸?"

"아니요, 저는 다리가 아파요."

"그거(휠체어) 잘 타네."


저녁을 먹는 데 앞의 할머니께서는 혼자서 식사 못하신다며 조무사들에게 도움을 청하셨다.

파킨슨으로 몸이 안 좋다 하시면서 그래도 아직 청력과 치아는 쓸만하다며 '자랑'하셨다.


옆의 '몰라'할머니는 당신 저녁밥이 안 나왔다며 아들에게 전화를 하셨다. 할머니 음성 뿐 아니라 전화를 받고 있는 아들의 목소리까지 쩌렁쩌렁 다 들릴 정도로 소리가 깜짝 놀랄 정도로 컸다.


"야, 넌 어미를 굶겨 죽일 참이냐? 오늘 새벽에 밥 반공기 먹고 병원 와서 이제 입원했는데, 아직 저녁도 안 준다."

"엄마, 입원 시간이 늦어서 저녁 신청이 안 됐어. 간호사한테 말했으니까 좀 기다려."

"오늘 저녁도 못 먹으면 내일 아침 수술하고 오후까지 금식하고, 이 뭐냐. 굶어 죽으라는 거냐?"

아들이 간호사와 직접 통화를 했는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와 식사 신청이 안 되어 있지만 구내식당에 부탁해서 지금 가져오는 중이라며 잠깐 기다리시라 할머니를 달랬다.


그런데 '몰라'할머니는 엉뚱하게 당신이 10년 전 이 병원에 입원하셨던 얘기를 하신다.

"할머니, 수술한 적 있는지 모르신다 하셨잖아요?"

"수술? 몰라. 나 여기에서 6개월 입원했었어. 내 기록 여기 없어?"

"나가서 찾아볼게요."



다인실에 묵다 보니 옆의 환자가 바뀌는 것도 적잖이 스트레스가 되는 것 같다. 어제는 젊은 사람들이 병실을 채웠었는데 오늘은 할머니들이 병실을 채워 마치 요양원에 들어와 있는 듯 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 할머니들 특유의 의도하지 않은 '유머'로 나를 웃게 해 주시니 다행이다.


울 엄마가 살아계셨으면 이 분들처럼 80대 할머니였을 텐데,

내 기억의 울 엄마는 영원히 50대 중반이다.

그래서인지 80대 어른들을 보면 엄마가 아니라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생각 난다.


28/08/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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