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우유와 바나나맛우유의 차이는 무엇?
성해나 작가의 단편 <혼모노>는 삼십 년 박수 무당(남자 무당)이 이제 막 신 내림을 받은 스무 살 신애기에게 내쫓기는 이야기입니다. 혼모노는 ‘진짜’를 뜻하는 일본어입니다.
1. 삼십 년 짬밥에게 도전장을 내민 신출내기
보름 전 박수의 앞집으로 신애기가 이사를 온 뒤 손님도 신령들도 박수를 떠났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신령들이 떠난 건 두 달 전이고, 신애기가 이사를 온 건 보름 전이지요. 박수는 고등학생 시절 신 내림을 받은 이후 삼십 년간 영험한 무당으로서 굳건히 자리를 지킨 그야말로 베테랑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달 전 어느 굿판에서 신령들이 아무런 신탁도 내려주지 않았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말문이 트이지 않았다. 할멈은 물론 다른 신령들도 짠 듯이 공수(*무당이 신이 내려 신의 소리를 내는 일)를 내려주지 않았다.
신령님. 신령님, 오셨습니까?
다시 불러봐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신탁도 들리지 않았다.”(259)
공수를 받지 못한 박수는 허겁지겁 굿판을 도망쳤고, 그 모습은 카메라에 담겨 만천하에 공개되었습니다. 신령들이 외면한 무당. 박수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하루아침에 잃은 무당 아닌 무당, 가짜 무당이 되고 말았죠.
이런 상황에서 앞집에 이사를 온 건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신애기였습니다. 말년 병장이 신참 바라보듯 신애기를 애처롭게 대하는 박수에게 신애기의 첫인사는 꽤 패기 있었습니다.
“근데 어쩌다 이리로 오시게 되었습니까? 이 골목은 터가 세서 다들 꺼리는데.”(253) 박수가 이렇게 묻자,
“장수 할멈이 점지해 줬어. 네놈 앞집에 들어가라고.”(254)
할멈이란 박수가 극진히 모시는 장수할멈 신령을 뜻합니다. 할멈의 쪽집게 같은 신탁 덕에 박수가 이 바닥에서 용한 점쟁이로 통할 수 있었지요. 신출내기가 무엄하게도 할멈을 마치 자기 친구 대하듯 말하는 통에 어안이 벙벙한데, ‘정말 신령들이 떠나 신애기에게 간 걸까’ 겁도 납니다. 그런 박수에게 신애기가 쐐기를 박습니다.
“신빨이 다했다더니 진짠가 보네. 할멈이 나한테 온 줄도 모르고.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254)
2. 흉내만 내는 놈
박수에게 이 말은 비수가 됩니다. 자신은 지금껏 신탁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신들이 그들의 대리인으로 임명해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는 자, ‘진짜 무당’이었지요. 신접을 한 순간 가짜가 아닌 진짜 시퍼런 칼날 작두 위에서 신명나게 춤을 춰도 피 한 방울 안 날 수 있는 신의 대리인.
두 달 전부터 박수는 접신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치 접신을 하고 있는 것처럼 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라고 여겼지 영원히 신들의 말씀이 들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평생을 신들의 말씀을 듣고, 그걸 전하며 살아왔는데.
그런 내가 가짜? 가짜라고?
정체성의 위기를 맞은 박수에게 처음 찾아온 감정은 서운함이었습니다.
장수 할멈은 박수가 자기 자신보다 위했던 존재였습니다. 정말 살뜰히 챙겼습니다. 밥도 할멈이 좋아하는 고두밥으로, 찬은 고춧가루가 섞이지 않은 담백한 것으로, 꽃도 지화가 아닌 꼭 생화로 구해다 두었습니다. 그런 할멈이 자신에게 준다던 인간문화재를 이제 막 무당 생활을 시작한 신애기에게 준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오욕에 찬 늙은이로 취급하면서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자기가 할멈을 지금까지 어떻게 모셨는데.
진짜 무당으로 살기 위해 진짜로 지고지순하게 모신 할멈이 자신에게 아무 예고도 없이 젊은 애에게 가버렸습니다. 그것도 바로 앞집으로 말이지요.
할멈은 박수를 ‘진짜’로 만들어준 황금이었습니다. 할멈이 자신에게 왔기에 도금이 아닌 순금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데 할멈이 자신을 떠났습니다. 할멈이 떠난 자신은 속이 텅 빈 납과 같습니다. 존나 흉내만 내는 가짜 말이지요.
3. '진짜 가짜’와 ‘가짜 진짜’
그런데 말입니다.
박수가 느낀 서운함의 진짜 정체를 박수는 알았을까요?
할멈이 예전처럼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면 ‘흉내만 내는 놈’이 진짜로 부활할 수 있을까요?
박수는 이 순간 할멈을 걷어차 버립니다. 신애기도 ‘아웃 오브 안중’의 자세로 대합니다. 서운함, 억울함, 증오, 미움이라는 감정을 공중에 날려버립니다. 자기가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면, 그건 남이 아니라 ‘자신’에게라는 걸 깨닫습니다.
10년간 자신을 모셔왔던 한 의뢰인이 박수가 신빨이 다한 것을 알고 신애기에게 굿을 의뢰합니다. 굿판에 나설 자격이 있을 리 없는 박수지만, 그 자리에 갑니다. 그리고 작두를 탑니다. 옆에는 신접을 해서 깃털처럼 가볍게 칼춤을 추는 신애기가 있습니다. 박수의 작두타기는 피를 뚝뚝 떨어뜨립니다. 하지만 박수는 멈출 생각이 없습니다. 결국 신애기가 나가떨어집니다.
“삼십 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280)
박수는 굿판에서 신접을 하지 못한, 철저한 가짜 무당입니다. 하지만 그는 신을 떠나 자기에게 충실합니다. 오직 자신이 할 일을,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입니다. 그렇게 자유를 얻습니다. 자기 안에 담아두었던, 그래서 진짜로 취급받았던, 신령을 온전히 스스로 버려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이 됩니다.
가짜 무당 말입니다. 무당으로서는 가짜지만 자기 자신으로서는 진짜인 온전한 존재. 박수는 드디어 자신을 찾은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280)
4. 용기가 진보를 낳는다
체호프의 단편 <상자 속의 사나이>에서 벨리코프는 영원한 상자, 관 속에 묻히자 행복한 웃음을 짓습니다. 진정으로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지요. 어떠한 구속이나 간섭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자기만의 공간에서 만족합니다.
21세기에 사는 박수는 자기 안에 신을 모시고 자유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짜라는 대접을 받았고 그것이 자기 존재의 이유라는 것을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들이 떠나고 자기 안이 텅 비었을 때, 그리하여 가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자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했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신들을 위해서? 신들의 말씀을 애타게 기다리는 철저히 남인 사람들을 위해서?
박수는 깨닫습니다. 자신이 가짜 진짜였다는 사실을요. 사람들이 자신을 존중했던 이유는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자기 안에 들어 있는 신들 때문이라는 것을요. 스스로도 자신이 자신인지 신인지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을요.
진짜 가짜가 되고서야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박수. 자유를 찾은 박수. 박수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150년 전 상자 속의 사나이는 상지 밖으로 나올 용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영원히 그대로의 자신으로 있고자 했습니다. 그곳에 안주했습니다. 하지만 150년이 지나서 진짜라는 상자를 품고 살면서 자신이 진짜라고 생각했던 한 인간은 그 상자를 밖으로 내던집니다. 그럼으로써 가짜가 되지만, 그로 인해 진짜 자기 자신이 됩니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말을 저는 이런 상황에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전형성과 정형성에 갇히기보다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믿으려는 의지. 바로 그 용기 있는 의지가 역사를 진보하게 만든다고요.
그런 점에서 성해나의 <혼모노>는 ‘진짜’(혼모노)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