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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Jul 19. 2024

체호프 <상자 속의 사나이>: 내 안에 갇힐 자유

당신의 자유는 무슨 모양인가요

여러분에게 자유란 무엇인가요. 언제 자유롭다고 느끼나요? 혹은 언제 자유롭고 싶은가요.


자유

자유란 단어를 떠올리면 벽도 천장도, 심지어 바닥도 없는 공간이 떠오릅니다. 비행기가 붕 오를 때의 현기증을 잠시 참고 나면 좁은 창문 밖으로 구름이 지나갑니다. 때론 구름조차 없이 진공 상태 같은 하늘빛을 만나기도 하지요. 아, 자유롭다. 이 말이 절로 나옵니다.

하지만 창문 밖에서 만나는 허공의 자유는, 겨우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팔다리를 펼 수도 올릴 수도 없는 비좁은 자리에 열 시간이고 열세 시간이고 비행기가 지상에 착륙할 때까지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만 가능합니다.(팔다리가 편안한 럭셔리 여행을 할 형편이 안 되는 저로서는 비행기란 그런 이미지입니다.) 한마디로 눈만 호강하는 자유지요.

패러글라이딩을 하면 허공을 직접 느낄 수 있다고요?

아, 마음껏 바람을 느꼈던 작년 봄이 떠오르네요. 정말 기분이가 상쾌했습니다. 비행기 속에서 보는 하늘과 패러글라이딩을 하면서 느끼는 하늘. 스크린만 멀뚱히 보다가 넓은 아이맥스 관에서 4D로 영화 관람하는 차이랄까요. 

하지만 패러글라이딩 또한 온몸을 로프로 꽁꽁 묶고 조종사 분의 운전에 의지해야만 비행이 가능합니다. 게다가 폼 나게 비행하다가 착지하는 순간에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온몸이 끈과 천에 뒤엉켜 꼴이 참 말이 아니게 될 때의 쑥스러움이란…. 


흔히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라고 하는 책임이 그런 걸까요? 허공을 볼 수 있도록 공기조차 들어올 수 없게 만드는 밀폐된 비행기, 바람을 맘껏 맞도록 내 몸을 감은 로프. 구속되지 않고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이 자유의 아이러니라니


진정한 자유란 어디에 있을까요. 아니, 자유란 무엇일까요. 




<상자 속의 사나이>는 벨리코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어 선생님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자유로운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외부 환경이 그 속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스스로를 밀폐시킨 자기만의 공간 안에서 그는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이웃들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산도 우산집 속에 들어 있고, 시계도 잿빛 세무로 만든 시계집에 들어 있고, 연필 깎으려고 칼을 꺼낼 때 보면 그 칼도 쪼끄만 칼집에 들어 있었습니다. 항상 옷깃을 높이 세우고 다녀 얼굴도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148)


왜 그렇게 꽁꽁 싸매고 다녔냐고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기를 뭔가로 덮어 싸려는 극복할 수 없는 열망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자기를 고립시켜 외부의 영향에서 지켜주는 상자를 만들고 싶어 했다고나 할까요.”(148)

자유(自由). 국어대사전에서 ‘자유’를 찾아보면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라고 나옵니다.

벨리코프는 외부의 구속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스스로 외부와 자기 자신을 단절합니다. 모순이나 역설로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패러글라이딩의 튼튼한 로프라는 안전장치가 있어야만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자유란 철저한 조건부 계약일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벨리코프에게 외부의 구속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흥미롭게도 ‘허락’이나 ‘허가’였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장난이냐고요? 이웃들의 설명을 들어볼까요.


“학생들이 저녁 9시 이후에 밖에 나가는 것을 금하는 명령서나, 육체적인 사랑을 금하는 기사 같은 것은 그 사람한테 아주 분명하고 명쾌했어요. 금지되었으니 그걸로 끝인 거죠. 온갖 종류의 위반이나 일탈, 규칙 파괴 때문에 그 사람은 절망감을 느끼곤 했어요.”(149)


하지 말라는 것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사람. 규칙이 있어야만 숨을 쉬는 사람. 정해진 틀 속에 있을 때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 삐져나오는 것에 어쩔 줄 모르는 사람. 그 이름 벨리코프.


고백하건대, 저는 벨리코프가 이해가 됩니다. 내가 만든 원칙 안에서 나는 자유롭습니다. 목소리가 커지고 어깨도 펴집니다. 당당합니다. 원칙을 지키고 규율에 충실하다는 자긍심마저 있으니까요. 그런데 내가 그렇게 편안할 때 주변인은 어떤가요? 그렇게 원칙을 앞세우는 사람 옆에서 사람들은 답답함을 느낍니다. 자신들을 변칙적인 사람 취급하는 것처럼 기분이 나쁘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그 원칙이라는 게 그 사람이 만든 자의적인 원칙일 때가 많으니 문제인 거죠. 자기 식의 원칙. 자기만을 위한 원칙. 그러므로 원칙이 될 수 없는 원칙.


벨리코프의 원칙이란 그러했습니다. 동료 교사가 자전거를 타는 것을 보고 너무도 충격을 받은 나머지 벨리코프는 그를 찾아가 교육자의 행실이라기엔 부적절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걸 금하는 교칙이나 법이 없는데도요. 틀에 갇힌 사고죠.

이웃들은 그래서 벨리코프의 장례식이 끝난 뒤 “우리는 모두 기분이 좋아서 묘지에서 돌아왔습니다.”(165)라고 말합니다. 자기만의 원칙에 빠져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고 평가하고 비판하는 벨리코프 때문에 지금까지 숨 막혔거든요. 


하지만 저는 감히 벨리코프를 비난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측은함을 느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게 꼭 나인 것처럼 뜨끔했습니다. 특히 이 대목에서 저는 정체 모를 눈물이 명치에 걸린 기분이었습니다.


“관에 누워 있는 그의 표정은 유순하고 유쾌하며 심지어 신이 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상자에 자기를 담아준 것을 기뻐하는 듯했지요. 그래요. 꿈을 이룬 겁니다.”(164)


관 속에서 자기의 꿈을 이룬 사람. 외부 세계와 절대적인 단절에 이르게 된 사람. 유동적인 현실에서는, 파도치는 현실에서는, 복잡하고 다양한 현실에서는 자기‘만의’ 원칙을 ‘모두가’ 지키면 좋겠다는 꿈을 이룰 수 없는 사람. 결국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은 누워서 움직일 수 없는 비좁은 관 속뿐인 사람.


만약에 말입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원칙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았다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열 배, 백 배는 넓지 않았겠습니까. 자신은 이렇게 생각해도 다른 사람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다름에 대한 이해를 했다면 말입니다. 



벨리코프 씨.

당신은 어쩌면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는지요.

완고한 원칙 안에서 자꾸자꾸 자기의 세계를 좁히고 세상과 단절해 나가는 속 좁은 우리 말이지요.

당신은 우리를 밀어낼지 모르지만, 우리는 당신에게 친근감을 느낍니다. 우정을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당신의 상자에 노크를 하는 이가 누군지 궁금하다면, 그건 바로 나입니다. 반갑습니다. 



일러두기

<상자 속의 사나이>는 안톤 체호프 《사랑에 관하여: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대표 단편들》(펭귄클래식 코리아, 2010)에 수록되어 있다. 괄호 속 숫자는 인용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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