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동네책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석혜탁 칼럼니스트 Nov 22. 2017

선충원의 <변성>, 여러 의미로 ‘아름다운 소설’

[석혜탁 독서칼럼] 선충원의 <변성>, 여러 의미로 ‘아름다운 소설’


중편 소설 <변성>은 중국의 대문호 선충원(沈從文)의 대표작이다. 중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정재서 교수는 <변성>을 읽지 않는다면 중국 현대문학의 아주 중요한 측면을 외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역자 서문에서 단언한다. 정 교수는 이어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 내내 행복해 하기를 기원한다. 역자로서 충분히 가질 수 있는 희망이다.


필자는 역자의 바람처럼 이 책을 읽는 내내 참 좋았다. 글을 읽어가면서 절로 다동(茶峒)의 풍광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작품의 ‘우미한 분위기’에 유유히 젖어들게 하는 선충원의 유연하고 미려한 문장은 역시 압권이었다.

 

소설 속 사공 노인은 돈에 초탈하고 자신의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며 소시민적 안빈낙도의 삶을 구가한다. 나룻배로 강을 건너는 많은 사람들은 아무리 나루가 관가 소유라서 삯전을 내지 않아도 된다지만, 미안한 마음에 엽전을 뱃전에 놓고 내린다. 그럴 때마다 사공은 사람들의 정성을 사양하고, 엽전들을 하나하나 주워 그들의 손에 도로 쥐어주며 말한다. 


“난 관가에서 식량을 타먹는 사람이오. 쌀 서 말에 돈 700전이면 살 만하단 말이오. 이런 건 안 받아도 되오!”


황금만능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너무도 낯설고 부자연스러운 광경이다. 경제가 모든 것에 우선하고, 경제라는 키워드가 각종 선거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공약이 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호흡하고 있다. 돈은 더 이상 ‘수단’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목적’ 그 자체가 되려고 몸부림치는 듯하다.  


<변성>의 배경이 된 다동(茶峒)의 풍광 


“부자 되세요”라는 한 광고의 카피가 덕담처럼 회자된 바 있다. 한국 사회의 배금주의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이 광고 문구는 매우 성공적인 광고요, 효과적인 마케팅으로 평가받고 있는 실정이다. TV광고가 아무리 상업적 목적 아래 방영되는 것이라 해도, 지극히 물신적인 어법이 지배적 담론이 되는 사회를 건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공 노인은 준다는 돈도 마다하는데, 우리는 돈 때문에 가족도 살인했다는 끔찍한 소식을 전파를 통해 심심찮게 접하곤 한다. 1930년대에 쓰인 이 소설이 지금도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것은 한탕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환멸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취취야, 취취야, 할아버지 좀 도와다오. 저 종이 장수가 못 가게 잡아라!”

영문도 모르는 취취가 할아버지 얘기에 누렁이와 함께 산을 내려가는 그 사람의 앞을 척하니 막아섰다. 

(…) 할아버지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그 사람 손에 억지로 돈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잎담배 한 다발을 그의 봇짐 속에 넣어준 후 두 손을 비비고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젠 가도 되오. 어서 떠나슈!”(…) 

“할아버지, 전 또 그 사람이 할아버지 물건을 훔쳐서 싸우시는 줄로만 알았어요!”

“그 사람이 돈을 듬뿍 주는 거 아니냐. 나는 돈이 필요 없거든! 그래서 돈을 안 받는다고 했더니 그 사람이 막 우기더라고. 막무가내야.” 

사공 노인은 돈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돈을 많이 주는 종이 장수를 끝까지 쫓아가 되돌려준다.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가 횡행하는 현대사회에 일침을 가한다. 물론 시대가 엄연히 다른 만큼, 사공 노인처럼 아예 ‘돈이 필요 없다’는 생각 아래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돈과 인간의 주종관계가 역전되어, 돈에 종교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고 돈을 인생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우를 범하지 말자는 것이다. ‘화폐 페티시즘(fetishism)’으로 향하고 있는 지금의 작태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사공 노인이 갖고 있는 물질에 대한 초탈함, 그리고 느림의 미학을 몸소 실천하는 모습은 현대인에게 귀감을 주는 바가 적지 않다. 사공 노인은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상소가 말한 ‘적은 것으로 사는 사람들’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변성>의 아름다움에 취해 정신없이 책을 읽어나갔다. 동화처럼, 잔잔한 음악처럼 <변성>은 독서의 흥취를 돋우었다. 책장을 쉬이 놓지 않게 되는 불가해한 마력에 매혹되어 자꾸만 빠져 들어갔다. 천보와 나송만큼 취취를 사랑하게 됐고, 사공 노인의 죽음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 


하지만 선충원의 <변성>이 필자에게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문체의 미려함보다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한 고민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변성>은 2017년의 사회상을 꼬집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현대인의 일상성에 대해서 되돌아보고 심사숙려(深思熟慮)하는 시간을 제공한다. 여러 의미로 ‘아름다운 소설’을 찾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현대미술에 대한 다양한 이해 「현대미술은 처음인데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