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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양 Jan 09. 2021

의혹과 확신 사이

-조르조 데 키리코; 체념의 기사 vs. 믿음의 기사-

 

조르조 데 키리코, <거리의 신비와 우울>, 1914

 빛과 어둠이 세상을 둘로 가른다. 화면을 대각선으로 아찔하게 가르며 지평선까지 날카롭게 뻗은 왼편의 아케이드 건물은 작열하는 오후의 광선을 정면으로 받고 있다. 반면에 화면 오른쪽의 건물은 칠흑같이 어두운 그림자 속에 폐허처럼 묻혀 있다. 그 앞에 관처럼 놓인 컨테이너가 활짝 입을 벌리고 있다. 그 속에서 금방 무언가가 튀어나간 것 마냥 어째 불길한 기운이 감돈다.

 이때 한 소녀가 광장에 들어선다. 오른손으로 제 몸집만 한 굴렁쇠를 굴리며 소녀는 달린다. 소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소녀의 머리가 향하는 방향을 눈으로 따라가 본다. 아뿔싸, 시커먼 그림자가 잠복해 있다. 그것은 길고 뾰족한 창을 든 건장한 사내의 실루엣으로 몹시 위협적이고 공격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저것이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이제 소녀의 운명은 어찌 되는 것인가?

 

 새해가 밝았다.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여사여사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아무거나 쓰고 싶지 않아서 그동안 아무것도 쓰질 못했다,라고 좀 전에 썼다가 지운다. 써서 뭐하나 아무 의미 없다,라는 생각에 쓰지 않았다는 게 더 솔직하지 싶다.

 며칠 내내 조르조 데 키리코의 그림 <거리의 신비와 우울>을 붙잡고 씨름했다. 많은 학자들이 이 그림을 두고 허무주의와 연관시켜 해석하듯이 나 역시 그림을 보며 허무를 읽었다. 특히 “끝없는 회전과 반복이라는 점에서 굴렁쇠의 운명은 인간의 삶과 동일하다”라고 쓴 야콥 카츠(Jacob Katz)의 글은 굴렁쇠를 굴리는 그림 속 소녀의 몸짓도, 생의 의지를 다지려는 나의 몸부림도 모두 반복된 헛고생이라는 시지푸스(Sisyphus)의 제스처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는 그림 속 소녀를 "예정된 허무의 세계로 안내"(한선경)함과 동시에 나로 하여금 내 존재의 목적에 대한 의혹을 가중시켰다.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일의 끝없는 반복, 보상도 보람도 없는 무익한 순환, 그리고 점점 더 쌓여가는 실패의 기억. 이것들이 나를 구성해 갔다. 

 그러자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모든 자발적 활동은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타인과 익명의 권위를 의식하며 그들이 나에게 바라는 바를 내 직무로 삼고 성실히 수행할 때야 그나마 내 존재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손이 닳도록 걸레질을 하고 밀가루를 뒤집어써도 도저히 해갈할 길 없는 이 깊은 무력감. 나는 밤만 되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다. 잘 자리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낮에 무얼 했는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아 당혹스럽다. 무엇을 열심히 했든지 간에 가차 없이 모두 공으로 돌아가는 이 가혹한 순간. 나는 꼭 해야 할 것만을 남겨두고 엉뚱한 짓을 하느라 기력을 쇠잔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나는 또 가짜 활력을 내어 이리저리 몸을 굴려댄다. 모든 것이 그저 반복이다.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뭘 바꿀 수 있을까?

 나는 과대망상과 무력감 사이를 오가며 나를 건저 줄 어떠한 '확신'에 목을 맨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시간과 기적에 의탁하게 만드는 일. 자력으로는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외부의 힘이 내 삶에 관여해 주길 소망하고 종국엔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하리라는 상상에 매달리는 일이다.

 그런데 불쑥 내 정수리를 때리는 일갈. 기적이 시간이 왜 나를 위해 일하겠는가? 나도 나를 위하지 않는데.......

 나는 데 키리코의 그림을 다시 본다. 소녀의 운명을 낙관할만한 단서는 그 어디에도 없다. 옆에서 시름을 나눠 줄 동무도 하나 없으며 구세주의 날개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도무지 확신이란 게 있을 수 없는 상태. 혼란스럽고 두려우며 '의혹'만이 넘쳐난다.

 그러나 '확실'은 있다. 모든 불길한 징조를 앞에 두고 소녀가 달린다는 것.

 이것은 허무주의로의 순응일까 아니면 의혹을 넘어서려는 저항의 몸짓일까? 이 미련한 짓을 나도 따라 해 볼 수 있을까? 내 운명을 내 손으로 굴리며 불안정성을 향해 돌진하는 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체념의 기사인 걸까 믿음의 기사인 걸까?

  

"나는 이제 여정의 목적지에 지쳐 서 있다./ 지친 머리는 월계관을 쓰고 있기도 힘들구나./ 그래도 내가 했던 일을 기쁘게 돌아보는 것은,/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쇼펜하우어, <피날레>) 1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1888~1978)는 그리스 태생의 이탈리아 미술가로 초현실주의 미술의 단초를 제공한 유파 중 하나로 꼽는 형이상학 회화(metaphysical art)를 대표한다. 

데 키리코가 창출한 회화적 공간은 현실의 도시 풍경이라기 보다는 화가의 내면 풍경으로, 그의 작품은 불안과 멜랑콜리의 정조, 그리고 무의식과 연계하여 논의되곤 한다. 친숙한 공간은 그의 멜랑콜리한 심리상태와 꿈과 환상, 기호와 상징, 데페이즈망의 독특한 표현 수법을 통해 낯설고 기이하게 바뀐다. 

데 키리코가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탐미했다고 알려지는 만큼, 그가 시각적 이미지로 환기한 철학적 명제는 합리적인 사고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수수께기 그리고 불안과 실존의식이었다.  

이러한 그의 철학적 사유와 지성적 미, 은유와 상징의 회화 기법은 초현실주의 미술이 태동하는 데 중요한 밑걸음이 되었다.



1)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홍성광 옮김,『쇼펜하우어의 인생론과 행복론』, 을유문화사, 2013, 476쪽.


 [참고문헌]

쇠엔 키에르케고르, 임춘갑 옮김,『공포와 전율』, 치우, 2011.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홍성광 옮김,『쇼펜하우어의 인생론과 행복론』, 을유문화사, 2013.

한선경,「조르지오 데 키리코 도시정경 연구: 아케디아와 멜랑콜리 개념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미술사 석사학위 청구논문, 2005.


조르조 데 키리코의 회화세계에 대하여 더 알기를 원한다면 아래 링크로.

https://brunch.co.kr/@hyojooyang/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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