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픽킹(picking)’ 일에 투입되었다 근데, 한 명만 다음날 바로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언니랑 나랑 둘이서 "가위바위보" 게임을 해서 진 사람이 가기로 했다.
내가 이겼다. 속으로 너무 기뻤다. 언니가 첫날 새벽 5시에 일어나 일찍 준비를 해서 나갔다,
오후 2시 즈음 돌아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앞이 막막해졌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거 한 번 해보자 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조금 경악스러웠다.
커다란 기계에는 라인마다 열 개 정도의 의자가 달려 있었고, 거기에 앉아 지나가는 토마토를 따서 바스켓에 담는 일이었다.
라인은 1번부터 8번까지 있었고,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섞여 있었는데, 수확량에 따라 라인별로 돈을 나누는 구조였다.
일을 느리게 하면 같은 라인에 앉은 사람들에게 눈치를 보거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흙먼지에 뒤덮인 채 금세 더러워졌고, 상한 토마토 냄새는 너무너무 지독해서 그 후 몇 년간은 토마토를 쳐다보기도 싫었다.
나도 일을 잘하진 못했지만, 언니는 특히 손이 느려서 여기저기서 퇴출당하기 일쑤였다.
결국 우리는 농장 일을 접고 그냥 시드니로 돌아갈까 고민하던 찰나, 집주인이 “팩킹(packaging)은 덜 힘들다”며 새로운 농장을 소개해주었다.
그 농장의 며느리는 한국인이었는데, 말투가 아주 투박하고 거칠었다. 돌아보면 그 농장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농장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일종의 ‘갑질 천국’에 가까웠다.
영어도 학벌도 필요 없고, 농장일만 잘하면 왕처럼 군림할 수 있는 곳.
농장일이 돈이 되다 보니, 그 맛에 취해 자기가 정말 잘 나가는 사람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풍경이다.
처음 팩킹장에 들어갔을 땐 기계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몸이 익숙해지고, 감각도 따라갔다.
솔직히, 언니와 나는 농장일과 전혀 맞지 않았다.
체력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그럼에도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마지막 집에서 만난 하우스메이트들 덕분이었다.
같은 농장에서 일하지 않았기에 부딪힐 일도 없었고,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버팀목 같았다. 일 끝나고 집에 돌아가 친구들과 뭘 해 먹고 놀지를 상상하는 게 하루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 당시 우리가 살던 곳은 ‘보웬’이라는 지역이었고, 인터넷도 거의 되지 않았다.
마침 <나는 가수다>가 유행이었는데, 누군가 USB에 파일을 담아 오면 다 함께 모여 떠들며 보곤 했다.
할 것도, 볼 것도 별로 없던 시절. 마트에 가는 게 유일한 외출이었고, 산책하고 수다 떨고 요리하며, 새벽마다 농장에 가는 나날의 반복.
정해진 시간 동안만 머무를 거란 걸 알았기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무 걱정 없이, 원초적으로 살아냈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년 비자를 연장받고, 우리는 다시 시드니로 돌아왔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농장의 삶이지만, 그때의 리듬과 단순했던 일상은 때때로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