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무너지는 방어선
그날은 엄마가 7년의 투병 생활을 끝내고 세상을 떠난 지 불과 세 달이 지난날이었다. 택시 백미러로 멀어지는 오빠의 모습이 점점 작아져 가는 걸 보며, 마음속에서 얽히고설킨 감정들이 요동쳤다. 그가 내 곁에서 멀어질수록, 가슴속에서는 무언가가 조여 오는 듯한 압박감이 밀려왔고, 동시에 그가 멀어져 가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가족의 구타는 내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유년시절, 내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을 때, 아빠는 엄마를 무릎을 꿇린 채로 허리띠를 휘두르며 칼춤을 추고 있었다. 그 광경은 잊혀질 수 없는 지옥의 순간으로 남아 있다. 아빠의 허리띠가 허공에서 뱀처럼 혀를 날름거렸고, 엄마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바닥을 응시하며 신음소리조차 내질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고, 두 볼에 물기가 맺혀 있었지만,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그때의 엄마는 마치 연약한 꽃잎처럼 휘청거리고 있었고,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은 그녀의 무기력함을 더욱 부각했다. 아빠의 고함이 뒤섞여 그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고, 엄마의 몸은 땅에 눕혀진 것처럼 무겁고,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손은 고통에 찌든 듯 떨리고 있었고, 힘없이 주저앉은 몸은 비참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그 순간, 엄마의 고요한 절망은 집안의 모든 소음 속에서도 더욱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아빠의 폭력 속에서도 그녀는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 처절한 상황 속에서 오직 고요함으로 응답하고 있었다. 나는 힘없는 작은 몸을 웅크리고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광경은 나에게 폭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인지 각인시켰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아빠의 행동이 비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패턴은 자연스럽게 나의 오빠들에게도 이어졌다. 그들의 기분 상태에 따라 나는 언제든지 폭력의 대상이 되었고, 그러면서 나는 나 자신을 방어할 방법조차 잊고 있었다. 그들의 폭력은 나를 단순히 신체적으로 때리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나의 자존감은 그들의 손아귀에서 무너져갔고, 나의 자존감을 파괴하고 내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 나는 그들의 폭력 속에서 나의 나약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이 나를 때릴 때마다, 그들의 얼굴에서 아빠의 모습이 겹쳐 보였고, 나는 그 시선 속에서 내가 잃어버린 안전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의 폭력은 어린 내 마음에 새겨진 아빠의 모습과 겹쳐져, 그 고통을 더욱 깊게 했다. 나는 그들의 행동을 받아들이고, 내가 무언가 잘못했기에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굳어져갔다.
그 얽힌 감정 속에서 나는 점점 더 고립감을 느꼈다. 폭력의 연쇄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가족은 나에게 안전과 사랑이 아닌 공포와 고통을 주었고, 나는 가족 안에서 나의 존재가 얼마나 덧없고 무가치한 지를 깨달아갔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면서, 나는 가족 안에서 홀로 버텨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S의 집은 골목길을 비틀거리며 지나, 택시 한 대가 겨우 들어갈 정도의 좁은 길 끝에 있었다. 초록 페인트가 벗겨진 철제문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S는 발로 힘차게 밀어 그 문을 열었고, 지하로 들어가는 계단을 내려가며 마치 땅 속 깊은 굴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서 보이는 회색 철문은 다소 음산하게 느껴졌고, 그 집이 S의 집이었다.
회색 철문을 열자, 그 안은 온통 깜깜한 세상이 펼쳐졌다. 적막과 어둠이 함께한 이곳은 내가 숨어있기 딱 좋은 장소였다. S는 벽을 더듬으며 스위치를 켰고, 그 순간 방 안에 잠재되어 있던 어둠이 잠시 물러났다. 불빛이 켜지자마자, 바닥에 있는 바퀴벌레들이 파드닥하고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어지럽게 튀어 다니며, 세탁기 아래나 가구 뒤로 숨으려 했다. 하얀빛이 그들의 몸을 스치며, 그들 속에서 일어난 혼란은 마치 방의 정적을 깨뜨리는 작은 폭풍 같았다.
S는 나를 부축해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지하실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지만, 나는 몸을 누우니 마치 어깨에 메고 있던 육체의 껍데기를 벗어버린 듯 편안함을 느꼈다. 등 통증으로 바로 눕지 못하고 구부정하게 옆으로 누웠더니, 철창살로 이루어진 창문 너머로는 골목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의 모습은 흐릿하게 보였고, 나는 ‘언제쯤 내 두 발로 저 밖을 걸어 나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햇살이 들어오지 않는 작은 방은 세상이 멀리 떨어진 듯한 공간이었다. 비좁은 주변의 벽은 나를 감싸 안아 주는 듯했고, 그 속에서 나는 안전함을 느낄 수 있었다. 철창살로 가려진 작은 창문 너머로는 흐릿한 골목길이 보였는데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는 나에게 세상의 일부를 상기시켜 주는 듯 안전함마저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주변의 풍경은 점차 익숙해졌다. S는 여전히 내 곁에 있었고, 그의 보살핌 덕분에 나는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처음의 두려움은 잊혀갔지만, 그 대신 불안이 마음을 지배했다.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 상처가 남긴 기억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S가 내 멍든 등에 연고를 바르며 중얼거렸다. “내가 너희 집에 가지만 않았어도. 가수가 될 사람인데 얼굴이 이래서 어쩐다니.” 그의 말은 내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나는 그 말에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나도 언젠가 다시 걸을 수 있을 거야.” 그 말이 나오자, S는 잠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 속에서 나는 그가 느끼는 걱정과 슬픔을 읽을 수 있었다.
지하의 어두운 공간 안에서도 나는 조금씩 나 자신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하지만 매일 같은 풍경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골목길의 소리가 점점 더 그리워졌다. 가끔은 창문 너머로 바람에 실려오는 소음이, 내가 누워있는 지하실에서 나가 세상 밖으로 걷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이 더해졌다.
눈과 입 사이에 생긴 딱지가 서서히 벗겨지며, 그 아래에서 새살이 돋아났다. 처음에는 붉고 부풀어 오른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색은 점점 더 변해갔다. 멍이 든 부위에서 피가 퍼지며 산화되어 푸르스름한 색으로 변했을 때, 나는 내 몸에서 무언가가 바뀌어 가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더 지나니 그 푸른색이 보라색으로 짙어졌고, 마치 저녁 하늘의 노을처럼 색이 겹쳐져 있었다.
그 과정은 작은 세상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각 색이 쌓이고 흐려지는 모습은 나의 고통과 회복을 상징하는 듯했다. 멍 자국이 남긴 흔적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점 엷어지며, 나는 나 자신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 사이, S는 내 곁에 머물며 나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다. 그의 다정한 손길과 보살핌은 내가 겪은 고통의 자국을 치유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S는 나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내 마음의 멍도 함께 아물게 해 주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