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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자현 Jan 16. 2021

번호표 먼저 뽑고 기다려주세요

이곳은 21세기 새로운 화개 장터

# 일 번 고객님.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달에 한 번 꼴로 저금통을 가져와 통장에 입금하는 고객님. 다섯 살 도윤이는 근처 어린이집을 다닌다. 칭찬받을 일을 하면 포도알 스티커를 받는데 그럼 아빠가 오백 원짜리 동전을 주신단다. 그렇게 모은 돈이 꽤 크다. 아직 돈의 단위는 모르지만 저축의 기쁨은 아는 씩씩한 도윤이. 부지런히 돈을 모아 가장 좋아하는 트럭을 산다고 한다. 아, 물론 장난감이 아닌 진짜 트럭. 하지만 저금통을 가져온 도윤이의 얼굴이 밝지 않다. “오늘은 안 무거워요. 아빠가 동전이 없다고 종이를 줘가지고…” 도윤이 어머니가 간신히 웃음을 참고 계신다. 그동안 저금통이 무거우면 많이 모아 왔다고 칭찬을 해주었는데, 이 때문에 가벼운 저금통이 영 불만인가 보다. 이건 나의 잘못이다. 오늘은 알려줘야겠다. 


“도윤아 이 종이는 동전 2개와 같아. 이건 오백 원 이건 천 원. 이 종이를 지폐라고 하는데, 앞으로는 이 종이를 많이 모아서 와. 그럼 더 빨리 트럭을 살 수 있어.” 도윤이의 눈이 반짝인다. “이 종이가 돈 더 많아요?” 결국 어머니가 웃음을 터트리신다. 다음번에는 지폐를 많이 모아 오겠다며 다짐하는 도윤아, 아버지 지갑 상황이 걱정되어 차마 말은 못 했지만  트럭을 사려면 노란색 할머니가 그려진  종이 가져와야 한단다. 그것도 아주 많이. 속으로 말해본다.


# 이 번 고객님. “아니 한 이천만 원 보내야 하는데 공인인증서가 카드라서 이체가 안 돼.” “네? 고객님? 인증서 사용하시는 게 불편하신 건가요 아니면...” “말을 잘 못 알아듣네. 내가 인터넷 검색해봤는데 공인인증서를 카드 말고 ott로 발급하면 가능하다고 그래. 처리 좀 해줘 봐요.” 온라인상에서 서명 또는 인감도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공인인증서. 현재는 여러 가지 불편한 문제점들로 금융 인증서라는 좀 더 쉬운 방법으로 다시 탄생했다. 그러나 고객님은 지금 보안 매체를 말씀하시고 있다. 공인인증서와는 다르다. 큰 액수의 금액을 이체하기 위해선  카드형으로 발급되는 보안카드 말고 더 안전한 보안 매체를 발급받으셔야 한다. 그것은 OTP라고 부른다. One Time Password. 


직원보다 인터넷을 더 믿으시는 이 고객님께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 말을 꺼내면 가르치려 든다고 할게 분명하다. 나는 알 수 있다. 왜냐면 느낌적인 느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ott라고 알고 계신 고객님에게 OTP라고 알려드리고 싶은데 쉽지 않다. 예전부터 opp, opt로 부르는 고객님과 이야기하다 보면 나도 헷갈려 막 부르게 되었다. 정신줄을 꽉 붙잡아 들고 신청서에 적힌 ott를 아.. 아니 OTP를 형광 펜으로 동그라미 치고 빨간펜으로 별표를 그려 고객님 앞으로 쓱 내민다. 고객님 부디 저의 노력을 봐주세요. “처리 다 되셨습니다. 이제 편하게 이용하실 수 있으십니다.” “아니 무슨 ott가 오천 원 씩이나 해? 너무 비싸다.” 실패. 끝.


# 삼 번 고객님. “시장에서 정신없이 사고 나니까 돈이 모자라잖아. 내가 바로 입금해준다고 하고 부랴부랴 달려왔어. 이 돈 좀 바로바로 부쳐줘.” “시장 다녀오시는 길이 시구나. 제가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아유 김치 조금 한다고 갔는데 글쎄 배추 사고 마늘 사고 쪽파 사고 무사고 액젓... 아이고 액젓을 안 샀네. 정신이 이렇게 없어. 배추 좀 줄까?” “네? 아 저 김치 할 줄 몰라요.” “사 먹어? 알려줄게 해서 먹어. 간단해. 산거 보나 훨씬 건강에 좋아. 배추 절여놓고 양념장 만들어. 쉬워 고춧가루 이만큼 마늘 요만큼…” 


고.. 고객님… 마음은 너무 감사합니다. 너무 감사한데 지금 뒤에 고객님이 많이 기다리셔요. 이제 마감시간이 다 되어서 고객님들이 다 저를 쳐다보십니다. 저 좀 살려주세요. 아뿔싸 할머니 한 분이 다가오신다. 이를 어째 기다림에 지치신 할머니가 화나셨다보다. 어떡해… 난 몰라...”배추 어디서 사셨어? 망에 얼마래?” 엥 이건 뭐지 무슨 일이 내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 “저기 시장에서 한 망에 5천 원, 열 망은 3천 원씩 3만 원이래요. 싸요.” “그러게요 싸네. 묵직한 게 잘 사셨어.” 


와 싸다 열망에 3만 원이라니. 한 망에 3천 원씩 이니까 열망을 사야 이득이지. 어머나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 정신 차리자.  “처리 완료하였습니다. 고객님 그럼 안녕히… “액젓을 사셔야 한다고? 풍성 마트에서 사셔.” “아 참 거기 가서 사야겠네. 고마워요. 거기 반찬코너가 잘해. 깔끔하게. 안 달고 안 짜.” “마져요. 나도 거기서 사다 먹어. 식구들이 좋아하더라고.” “아이고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어. 그럼 일 잘 보고 가세요” 아 풍성 마트 반찬 맛있는데, 오늘 저녁은 거기서 사서 가야지…? 아니 내가 지금 무슨… 그.. 그만 제발 그만.


# 사번 고…”저기  통장정리만 좀 해줘.” “사번 고객님이신가요?” “아니. 아닌데 이거 간단한 거니까 빨리 먼저 처리 좀 해줘요.” 이를 어쩐다. 가끔 바로 창구로 달려와 다짜고짜 먼저 업무를 보겠다 하시는 고객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의 순서를 기다리는 고객들에 대한 예의다 아니다. 이럴 땐 직원이 확실하게 정리를 해야 한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지금 사번 고객님의 업무를 먼저 처리하여야 합니다. 순서대로 업무처리를 도와드리고 있으니, 번호표 먼저 뽑고 기다려주세요.” “사번 고객님. 사번 고객님이신가요?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정확하고 신속하게 업무 처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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