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의 밥, 걸인의 찬
밤이 길었다. 아주 가끔씩 찾아오는 며칠 밤샘 근무는 육체보다 마음을 더 고단하게 만든다. 불이 꺼지지 않는 사무실의 조명 아래, 서류와 컴퓨터 화면을 번갈아보며 고요하게 흐르는 새벽을 견디다 보면, 문득 누구의 온기가 그리워진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정신은 일에 묶여 있었지만 마음은 자꾸만 떠나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아내를 떠올린다. 늘 조용히 곁을 지켜주는 사람. 내 일상을 묵묵히 감싸주는 사람.
마침, 오늘은 아내의 쉬는 날이었다.
“내일이면 보겠지만, 그래도 잠깐 얼굴 보고 싶어서.”
그 말과 함께 아내가 들고 온 것은, 다름 아닌 김밥 한 줄과 커피 두 잔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아내는 내가 밤을 새운 다음 날이면 꼭 김밥을 사 오곤 했다. 특별한 음식은 아니다. 그저 소박한 분식집의 평범한 김밥. 하지만 그 안에는 마치 보이지 않는 마음의 양념이 듬뿍 들어가 있는 듯하다. 먹는 순간, 피로가 서서히 녹아내리는 기분이 든다.
“당신 피곤할 텐데 김밥은 좀 쉬고 먹어야 속이 편하지 않아?”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따뜻할 때 먹는 게 제일 맛있어. 당신 마음이 뜨거우니까.”
아내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지만, 나는 안다. 아내는 늘 작은 것들로 내 하루를 단단히 붙들어주는 사람이다.
잠깐의 만남이었다. 짧은 점심시간의 공백, 커피잔에서 피어오르는 향기처럼 가볍고도 깊은 그 시간이, 내 하루의 가장 소중한 순간이 되었다.
김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일 이야기, 세상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그리고 또 잠깐의 침묵. 그 침묵조차도 편안했다.
“내일 또 밤샘이야?”
“아니, 오늘이 마지막. 내일 저녁에는 꼭 집에 갈게.”
“그럼 오늘은 이 김밥이 당신 저녁이네?”
“응, 당신이 준 거니까 최고로 든든한 저녁.”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지만, 나는 그 미소 뒤에 얼마나 많은 마음이 담겨 있는지 안다.
어쩌면 진짜 사랑은 이렇게 조용하게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장미꽃 한 송이도, 멋진 이벤트도 아닌, 김밥 한 줄과 커피 한 잔. 그것이면 충분히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너무도 깊고 단단한 마음이 아닐까.
오늘 밤,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길.
나는 속이 든든하고, 마음이 따뜻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랑이란 건, 어쩌면 이런 것.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고 언제 힘든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먼저 챙겨주는 마음.
누군가의 하루를 지탱해 주는 소박한 배려.
한 줄 생각 : 사랑은 거창한 날이 아니라, 평범한 하루의 김밥 한 줄에서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