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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을캐는 광부 Feb 20. 2024

철부지 사랑

운명 같은 하루의 시작

1992년 9월 17일 운명 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3평 남짓한 방은 가난한 내가 처음으로 짐을 풀었던 자취했던 방이지만, 어설프고 구슬프게도, 아내와 처음 신접살림을  이어나가야만 했던 신혼방이기도 했다. 


열 벌도 채 걸지 못하는 옷장, 외출복 이외엔 대부분 옷들은 벽에 못을 박아 걸어둔다. 300여 권의 책이 꽂여있는 책장은 여전히 나의 정신적 버팀목이기도 하다. 아내의 전용공간인 작은 화장대도 구입해 나름의 구색은 맞추었다.


백열등 하나로도 부엌을 밝히는 데에는 충분하다. 홑이불에 베개하나인 우리에게는 연탄불 아궁이 불씨를 꺼트리지 않아야 그나마 추운 겨울을 견뎌낼 수 있다. 한지로 덮은 빗살방문틀 사이로 들어오는 새벽공기는 차기만 하다. 


겨울 어느 날 방 한편에서 흐느끼는 소리에 새벽잠을 깨었다. 아내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 묻자 아내는 배가 너무 고파서

참을 수 없어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고...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배고프면 밥을 먹으면 되지?”


아내는 밥이 없다고, 쌀이 다 떨어졌다고 얘기하고선 한 번 더 울컥했는지 더 큰소리로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해가 동트기도 전에 평소 잘 알고 지내는 동네 형님을 찾아갔다.

사정 얘기를 하고 나니 10만 원을 선뜻 건네주셨다. 가까운 시장에 가서 쌀도 사고 반찬거리도 사고 아내가 첫아이를 가지고 난 후 유난히 잘 먹는 귤도 한 봉지 사 왔다. 이것저것 장 보는데 10만 원이면 넉넉했다.


우리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자고 다짐했다. 패기 넘치고 호기롭던 우리의 신접살림은 조금 이른 나이에 그렇게 힘겹게 시작되었다. 여유 있는 삶이란 애당초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내일부터 당장 일당 2만 원 하는 막노동을 해야 한다. 5일만 하면 되는데 겨울철에는 그나마 막노동일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아내의 배가 풍선처럼 많이 부풀어 올랐다. 신기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다. 두 달 정도 후면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가 태어나면 뭘 어떻게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막연히 잘할 수 있겠지?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나는 머지않아 아빠가 될 거니까...


정해진 군의 입소 날자는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막 아이가 생겼는데, 어린 아내와 아이를 두고 군대를 가야 하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가장으로서의 무게에 짓눌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내와 아이를 남겨두고 나는 군대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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