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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에 피겨 스케이트를 배운 이유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by 글쓰는 워킹맘

뜻밖에도 피겨 스케이트를 배웠다. 이 나이에, 이 무거운 몸으로 피겨라니 혼자라면 절대 시작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회사 후배가 점심시간에 같이 가자는 얘기에 눈이 멀어 신청했더랬다. 요즘 내 속에 불구덩이가 딱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으니 빙판 위에 서 있으면 열이 좀 식을까 싶기도 했다. 스케이트를 탈 줄도 모르면서 피겨라니!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이니 넘어지지만 않게 타보자고 마음먹었다.


처음 빙판 위에 올라가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스케이트를 타본 지 15년이 넘었으니 제대로 탈 수 없을 것 같았다. 넘어지지만 말자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일단 빙판 위에 서 있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야 하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넘어지면 크게 다칠 것 같은 두려움이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러다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떠올랐다. 러시아 사람들은 왠지 스케이트를 능숙하게 탈 것 같고, 겨울이 긴 곳이니 남녀노소 스키나 스케이트를 타며 추위를 견뎠을 테니 말이다. 작품 속에서 레빈이 키티를 만나러 스케이트장을 찾았던 날의 풍경을 상상했다. 사랑에 빠진 레빈에게 키티는 아무리 스케이트를 탈 줄 몰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맑고 추운 날이었다. 입구 근처에는 마차와 썰매, 마차꾼, 경찰이 줄지어 서 있었다. 깨끗이 차려입은 사람들이 밝은 햇살에 모자를 반짝이며 입구와, 눈을 말끔히 치운 길을 따라 붐비고 있었다. 처마에 조각이 붙은 러시아식 집들 사이에 길이 나 있었다. 정원의 오래된 자작나무들은 가지마다 눈을 떠안고 축 처져 있는 품이 새로운 명절 장식 같아 보였다.

키티를 발견하자 그의 가슴은 기쁨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스케이트장 맞은편 끝에서 어떤 귀부인과 이야기하며 서 있었다. 옷차림이나 몸짓은 특별해 보이지 않았지만, 인파 속에서 단번에 찾아낸 레빈에게는 그녀가 쐐기풀 가운데 핀 장미로 보였다. 모든 것이 그녀로 인해 빛났다. 그녀는 실로 주위를 환히 밝히는 미소였다. -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중에서
pexels-pavel-danilyuk-6539406.jpg 출처 : https://www.pexels.com


얼음 위에서 반짝반짝 빛난 키티, 그 빛남에 취해버린 레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도 키티처럼 빛났을까. 나의 20대는 싱그러웠을까. 30대는 결혼, 출산, 육아로 정신없이 보냈다. 40대는 치열한 고민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통과하고 있다. 이제 3년 남은 40대에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데 덜컥 피겨 스케이트를 배웠다. 그런데 스케이트를 타는 순간 너무나 즐거웠다. 잘 타지 못하는데 얼음 위를 느릿느릿 나아가는 게 뭐라고 신났다. 오직 넘어지지 않기 위해 집중하니 잡생각이 사라졌다. 그 덕에 웃었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나 좋자고 하는 일이 이렇게나 즐거운 일이었다니.


한 시간 스케이트를 타고 사무실로 돌아오면 그날 오후 업무는 아무리 힘들어도 견뎌냈다. 에너지가 채워지는 것 같았고, 피곤해도 피곤한 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다음날이면 다시 녹초가 되었지만 현실과 이상 세계를 오고 가듯 회사에서 스케이트장으로, 스케이트장에서 회사로 돌아오는 순간을 즐겼다. 내게도 이런 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아이들이 다 자라면, 더 나이가 들어 직장에서도 은퇴하게 되면 '그저 즐겁자고 하는 일'을 마음껏 해볼 수 있을까. 슬프게도 2월 피겨 스케이트 교실은 재등록하지 못했다. 아이들의 겨울방학 나기에 더 집중해야 했기에 '워킹맘의 딴짓'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버렸다. 왠지 서글펐지만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대신 <안나 카레니나> 시리즈를 다시 시작했다. 총 세 권으로 된 벽돌책에 가깝다. 이번엔 안나보다 키티와 레빈에게 집중해보려고 한다. 용기가 필요했던 내게 스케이트화를 신고 몇 가지 기초 기술을 배우게 해 준 주역들이니 말이다. 러시아의 겨울 풍경을 더 찾아보고 싶다. 아무리 추워도 빛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이번 독서가 끝날 무렵엔 스케이트장을 찾아갈지도 모르겠다. 달아오른 열기를 식혀보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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