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형준 Mar 25. 2021

모든 불행한 밥상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

밥상머리에서 배운 인생

"모든 행복한 밥상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밥상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


무표정으로 밥상에 앉았다. 표정 하나 때문에 밥상 공기가 무겁다. 아내는 눈치를 보기 시작하지만 아이들은 대수롭지 않은 듯 밥을 먹기 시작한다. 아내와 아이의 대화가 이어진다.

"보민이는 받아쓰기 잘했어?"

"어! 하나도 안 틀렸어."

"그랬어! 지난주에도 다 맞더니 오늘도 역시네."

"채윤이는 유치원에서 간식 뭐 나왔어?"

"요구르트랑 방울토마토 한 개도 안 남기도 다 먹었어."

"정말! 요즘 잘 먹네. 키 크려나 보다."

말꼬가 트이자 아이들끼리 대화가 이어진다. 차려놓은 밥은 이미 관심 밖이다. 내가 듣기에 별 시답잖은 내용도 자기들끼리 킥킥대며 연신 대화를 주고받는다. 숟가락 젓가락은 이미 제자리를 잃었다. 두고 보고 있으니 자세도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아이들 행동이 조금씩 거슬리기 시작한다. 짧은 단어로 주의를 준다.

"얌전히 먹어라."

딱딱한 말투가 신경 쓰였는지 자세를 바로 잡는다. 숟가락을 집어 들어보지만 한 번 풀린 기분은 다시 자리를 잡지 못한다. 

"언니 이것 봐라. 숟가락 두 개를 눈에 대면 누구 닮은 것 같지 않아?"

"어! 짱구에서 그렇게 장난치잖아."

큰 아이에게 화살을 겨눴다. 

"너 똑바로 앉아서 안 먹을래. 동생이 그런다고 너까지 그렇게 먹을래? 그따위로 먹을 거면 먹지 마. 밥상에서 지금 뭐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큰소리에 몸이 움츠려 드는 게 보인다. 얼굴엔 이미 웃음기가 사라졌다. 반으로 접힌 어깨로 조심스레 올려다본다. 그 눈빛에는 자기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랬다. 아이는 잘못한 게 없었다. 잘못은 내가 하고 있었다. 두 아이의 행동이 내 심기를 건드렸고, 작은 아이보다는 큰 아이에게 화를 내는 게 나을 것 같아 선택했던 거다. 일방적으로. 아이들이 금방 기분이 좋아지며 주체하지 못하고 장난을 쳤듯, 나도 순식간에 화를 터트렸고 제어가 되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이들의 웃음기를 없애기엔 충분했다. 웃음기가 사라진 밥상에서 다시 밥을 먹는다. 화를 쏟아낸 뒤 먹는 밥은 밥이 아니다. 대충 욱여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상에 모여 앉은 건 밥을 먹기 위해서다. 밥만 먹기 위해 둘러앉는 것도 아니다. 밥을 먹는 건 몸의 허기를 채우는 동시에 가족이라는 유대 감안에서 안정을 되찾는 시간이라 생각한다. 갓 지은 밥과 막 끊여낸 찌개, 밑반찬 몇 가지로 차려진 밥상에서 밥은 먹었지만 가족이 주는 유대감은 늘 부족했었다. 부모님이 장사를 할 때는 형들과 차려 먹을 때가 많았다. 장사를 하지 않을 땐 두 분이 함께 한 밥상에 앉는 경우가 적었다. 아버지는 밤, 어머니는 낮에 일해서 어쩌다 주말에 모이는 게 전부였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했다. 적은 행복감이라도 자주 느끼게 되는 게 더 큰 행복감으로 이어진다는 의미이다. 어쩌다 한 번 시간이 맞아 우연처럼 한 밥상에 앉아보지만 어색한 기운만 흐른다. 그마저도 별일 없이 지나가면 다행이다. 몇 번 안 되는 그 기회마저 안 좋은 기억을 남기기 일수였다. 시작은 두 분의 다툼이다. 당연히 부모님도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 짧을 수밖에 없으니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시간이 부족했다. 뻔한 살림에 마음도 쪼달리다 보니 상대에 대한 원망밖에 안 남은 것 같았다. 대화로 시작되지만 끝은 싸움으로 이어졌다. 싸움을 지켜보며 죄인이 된 듯 웅크리고 앉아 밥을 욱여넣어야 했다. 그 상황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게 밥 먹는 것뿐이었다. 최대한 빨리 먹고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내 기억 속 밥상은 언제나 먹는 데 집중해야 했고, 딴짓을 해선 안 되는 시간이었다. 

부모가 비만이면 아이가 비만이 될 확률이 높다는 연구가 있다. 부모의 비만이 유전자에 기억되고, 기억된 유전자가 아이에게 전해지고 성장하는 과정에 발현된다는 연구였다. 결국 부모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느냐가 아이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다만, 그런 환경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으면 얼마든 바꿀 수 있다고도 한다. 의지가 환경을 이길 수 있다. 아이들에게 불같이 화를 냈던 게 내가 자란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거라면 그걸 답습해야 할 이유는 없다. 더욱이 좋지 않은 거라면 부모가 먼저 끊어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부모는 아이들보다 경험이 많다. 경험이 많다는 건 일종의 힘이 될 수도 있다. 내 경험이 맞으니 나만 따라오는 식이 될 수도 있다. 서로에게 유익한 경험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하지만 일방이 불행해질 수 있다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거다. 그래서 힘을 빼기로 했다. 내 경험이 절대적이라는 믿음을 버렸다. 나도 배워야 할 게 많듯, 아이들도 채워야 할 빈 공간이 많다. 내가 먼저 힘을 빼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인정했다. 서서히 변하고 있다. 밥상에 둘러앉을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 함께 먹을 수 있는 게 있다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하루 중 한 번이라도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이라 생각했다.  


이전 03화 어머니가 만들어준 음식에선 뒷 맛이 남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