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 때 부모님의 이혼 이후 아빠와는 만나지 못했다. 아빠는 어느날 짐을 싸서 나가버렸고, 자고 일어나니 아빠가 남긴 편지 한장이 옆에 있었다. (아빠의 마지막 편지)
다시 아빠를 만난 건 스무살이었다. 스무살 때 다시 만났고, 지금은 내가 마흔이니 20년 동안 아빠와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느날은 아빠를 원망했다가, 아직도 힘들게 살고 있는 아빠가 불쌍했다가, 진심으로 아빠를 용서하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다 차치하고 아빠는 늙었다. 내가 12살 때 아빠는 40대였고, 지금은 어느새 70대가 되셨다. 코로나의 여파로 하던 일을 그만두셔야 했고 집에 계시면서 가끔 친구들을 만나는 게 전부인 생활을 하고 계신다.
아빠가 나와 엄마를 버리고 가버렸다고 생각했고, 아빠가 재혼한 사실을 알았을 때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빠가 재혼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이 든다.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 내가 아빠까지 책임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아빠의 남은 생은 그 분과 하시겠지만, 자식은 나 하나다. 그게 나에게는 또 부담이다.
그런 아빠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회사에서 아빠 전화를 받았다.
"별 일 없지?"
"별 일 없지. 아빠는?"
"몸이 좀 안 좋아. 그래서 집에만 있지, 뭐."
"어디가 안 좋은데?"
"모르겠다. 늙어서 그런가."
그냥 기운이 없다고 하셨다. 나는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나는 과연 아빠가 돌아가시면 슬퍼할까?'
아빠의 장례식장을 상상해보았다.
'자식이 나 하나밖에 없으니 내가 있어야 할 테고, 그 분과 함께 있겠지?'
'사람들이 와서 그 분을 내 엄마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싫은데.'
'일일이 엄마가 아니라 아빠의 재혼 상대라고 설명할 수도 없고...'
난 아직도 아빠가 나와 엄마를 버리고 그 분에게 갔다고 생각한다. 아니, 사실이 그랬다. 두 분이 만난 시기가 그랬으니까. 아빠의 무책임함에 아직도 화가 나고 재혼을 했다는 사실도 용서하지 못한 것 같다. 왜냐면 그 분이 너무 싫으니까. 생각해보니 내 아빠를 뺏어간 것 같다고 느끼는 것 같다.
장례식장을 상상하면서도 그 분이 내 엄마를 잠시라도 대신하는 것 같은 느낌이 싫은 것 같다. 아빠가 버린 나를 책임진 엄마가 너무 불쌍해지니까.
그런데 반대로 아빠와 같이 사는 그 분이 먼저 돌아가시면? 내가 아빠를 책임져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니 숨이 턱 막힌다. 아빠는 나를 책임지지 않았는데 나는 아빠를 책임져야 하나?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다가 정신을 차린다.
무뚝뚝한 딸인 나는 아빠에게 전화로 무심하게 대답하고 문자를 보낸다. 많이 안 좋냐고, 보약이라도 해드리냐고. 물론 아빠는 괜찮다고 하신다.
아빠에 대한 나의 이 감정을 설명할 수가 없다. 아빠가 없어도 난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아빠가 돌아가시면 마음이 아플 것 같고. 아빠한테 이런 감정을 갖는 게 엄마한테 미안하다가. 30년을 아등바등 살다가 힘없이 늙어버린 아빠를 보면 불쌍하다가. 여러 감정이 뒤섞여 엉망진창이다.
아빠를 다시 만난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차라리 다시 안 만났으면 그냥 미워하는 마음만 가지고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아직도 참 철이 없다.
마음의 수양이 더 필요하다고 느끼며, 오늘도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