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엄마가 남기고 간 것_두 번째

Day17 ; 홍성

by 현정

김장은 처음이었다. 나에게 김치는 당연히 사 먹는 반찬이었고, 평생 김치를 담가 먹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이맘때쯤 일가친척이 총출동해 김장을 한다는 건 시골 종갓집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일손이 필요해서라기 보다는 김장을 핑계로 오랜만에 식구들끼리 모여 얼굴이나 보자는 의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 생각이 틀려도 한참 틀렸었다.


새벽부터 분주한 이모들을 뒤로하고 두 시간쯤 더 자고 일어났을까. 눈을 떠보니 둘째 이모네 집 마당에는 트럭 한 대가 서 있었다. 절인 배추를 짐칸에 가득 싣고서.




350포기라고 했다. 살면서 배추 350포기가 한 자리에 있는 장면을 눈에 담아본 적도 없었다. 그나마 올해는 배추김치와 게국지만 해서 이 정도라고, 작년까지만 해도 깍두기에 알타리, 동치미 등등 더 많은 종류의 김치를 담갔었다고 했다. 이 정도면 평소 하던 양의 3분의 1도 안 된다는 말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TV에서만 보던 시골 종갓집의 김장 풍경이 홍성 이모네 집 마당에 펼쳐지고 있었다.


아침을 챙겨 먹고 나도 함께 작업에 투입됐다. 김장 초짜인 내가 맡은 일은 절인 배추의 꼭다리를 따는 일이었다. 배추의 꼭다리를 따고 상한 이파리를 떼어낸 다음, 옆에서 김칫소를 채우고 있는 이모들에게 넘겨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야무지게 고무장갑을 끼고서는 칼을 쥐었는데, 칼을 쥐는 손에서부터 어설픔이 흘러넘쳤다.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 왠지 주부 9단이 된 것 같기도 하고, 김장 나눔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여행 중에 동생으로부터 집에 김치냉장고를 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새 김치냉장고에 내가 만든(사실 내가 한 일은 배추 꼭다리를 다듬은 것뿐이지만 여하튼) 김치를 처음으로 넣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조금 설렜던 것도 같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김장도 끝이 나고, 몇몇 가족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둘째 이모네 집에는 내가 아는 얼굴들만 남게 되었다. 몸의 긴장이 풀어짐과 동시에 마음도 느슨해졌다.


새로 담근 김치와 수육, 푹 끓여낸 게국지로 차려진 저녁 밥상에 거사를 함께 치른 동지애가 더해져 안을 뜨거운 공기로 채웠다. 당연하게 이어진 술자리의 끝에 남은 사람은 나와 막내 이모, 사촌언니와 오빠였다.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부터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까지 솔직한 문장들이 오갔다. 술은 그저 대화의 공백을 메워줄 뿐이었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말, 모두 부정하며 살아왔다. 부모 자식 간의 연은 하늘이 점지해주는 것이라서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애써 외면했다. 어떻게든 가족이라는 운명을 끊어보려고 엄마와 연관된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고립시켰다. 이모들도, 사촌형제들도, 내가 스스로 떠나온 울타리였다.


외가 친척들은 당연히 나를 미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모두가 엄마의 편일 거라고 믿었다. 엄마를 처음 알코올 중독 치료 병원에 입원시킬 당시부터 치열하게 싸워왔고, 그래서 어쩌면 내가 그들을 미워한 건지도 모르겠다.


엄마로 인해 멀어진 관계들은 결국 엄마로 인해 다시 회복되었다. 엄마는 내가 스스로 떠나온 울타리가 아직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떠났다. 에게 또 한 번 가족이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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