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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서 May 17. 2024

에세이 <레프트 핸디드 레이디>

나의 불완전한 영웅에 대하여

   주어진 과제는 '다른 사람 소개글 쓰기'였다. 시작부터 E 이야기를 쓰고 싶지는 않아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훑어가며 다른 누군가를 찾았지만 소득은 없었다. 내가 써낸 이 글은 어쩌면 자기소개일지도 모른다. 나를 말할 때 E를 뺄 수 없고, E를 말할 때 나를 잘라낼 수 없으니.

    E는 요령을 모르는 사람인데 그건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해서 나는 그녀의 우직한 성실함에 감탄할 때도 그 요령 없음이 사무치게 답답할 때도 있다. E는 특유의 성실함과 고통을 잘 감내하는 성격 덕에 – 혹은 탓에 – 학창 시절 전국권까지 올라가는 모범생이었다. 말도 안되는 짓이었어. 그녀는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면 진저리를 친다. 나는 그 말도 안되는 노력의 흔적을 E의 오른손 가운데손가락에서 발견한다. 전혀 모범생스럽지 않은 손가락인데 무슨 소리냐고 묻는다면, E는 젓가락이나 연필 등을 정석대로 쥐지 못한다는 말로 대답을 할 수 있다. E의 오른손 가운데손가락 손톱 옆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있다. 연필을 희한하게 쥔 상태로 책상 앞에 앉아 공부만 하니 희한한 곳에 굳은살이 생긴 것이다. 이 시점에서 E를 대변하겠다. 그녀는 왼손잡이로 태어났고 아주 근면성실하게 그것을 고쳤다. E는 대부분의 일을 왼손으로 하지만, 글씨를 쓸 때만은 후천적인 교정 때문에 오른손밖에 쓰지 못한다. 왼손을 쓰게 놔뒀으면 E의 손가락 끝에 딱딱한 굳은살이 생길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때 세상은 왼손잡이를 대체 왜 고쳤을까?

    당신은 이미 눈치챘겠지만 E는 나의 엄마이다. 그리고 당신이 아마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E는 이혼한 싱글맘이다. 내가 이 사실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알리고 다니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한예종 입시를 마음 먹었을 때 즈음. 염병 이걸 내가 왜 숨겨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분노를 인지했을 때 즈음. 그러고 모든 게 해소되었다면 좋았겠지만, 흠.

    내 오른손 가운데손가락 손톱 옆에도 굳은살이 있다. 그리고 나는 젓가락 쥐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E를 원망한 적이 있다.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니다. 젓가락을 제대로 쥐지 못하면 가정교육 못 받은 것 같아 보인다는 말을 어디서 주워들었고, E의 이혼을 밝힌 이상 내 행동이 가정교육 운운을 불러오는 건 죽기만큼 싫었다. E는 누구보다도 성공적인 가정교육을 해냈으며 누군가 그걸 의심이라도 하면 멱살을 잡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남의 시선을 과하게 의식했다….

    나는 여전히 E 이야기를 할 때면 다른 창작을 할 때보다 배는 예민하다. 이 주제에 있어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것 역시 아직 어렵다. 지금보다 조금 어렸을 때의 나와 다른 건, 그냥 젓가락을 어설프게 쥔 채로 피클 같은 걸 집어먹는다는 거. 내 젓가락질을 고치려 들지 않다는 거. E가 그 사실을 안다는 거.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자란 모범생은 훗날 왼손잡이다운 결정을 밀고 나간다. 이곳에서 왼손잡이다운 인생은 어느 하나 쉬운 구석이 없다. E와 나는 두세걸음마다 폭풍우를 맞닥뜨렸지만, 때로는 그 폭풍우 한가운데서 옴팡지게 비를 뒤집어쓰고 깔깔 웃었다. 네모진 건물 안에서 종종거리며 폭풍우가 지나가기만을 마냥 기다리는 이들은 그 개운한 웃음을 평생 모를 테이다.

    나의 불완전한 영웅 레프트 핸디드 레이디. 딸내미는 그녀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조심스러우면서도 그녀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이 글이 어쩐지 우리의 굳은살 같다는 생각을 마지막에 슬쩍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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