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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유 Oct 25. 2024

매도는 타이밍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매수인을 만나는 것에 대하여

버스커버스커의 옛 노래 중 ‘사랑은 타이밍’이란 곡이 있다. 담담한 기타 연주 사이 섞인 장범준의 독특한 보컬은 누구에게나 있을 만한, 타이밍을 놓친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아련하게 노래한다. “내가 있어야 할 순간에 내가 있었더라면. 운명이란, 인연이란, 타이밍이 중요한 건가봐.”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가사다.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신촌의 뒤안길에서 100퍼센트의 남자 혹은 여자와 마주쳤더라도, 나는 이미 결혼해 애가 둘이나 딸려 있고 상대는 대학 졸업은커녕 군대마저 다녀오지 않은 상태라면? 제아무리 100퍼센트의 상대일지라도 그들은 인연이 되기 사실상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100퍼센트에는 못 미칠지언정, 법적・사회적・윤리적 문제 없이 성숙하게 사랑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나타난 90퍼센트의 상대야말로 진정한 운명의 짝이 될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다. 그리고 세간에서는 이를 ‘타아밍’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그 모든 게 준비되었고 95퍼센트쯤 되는 여자 혹은 남자와 홍제천 폭포카페에서 우연히 조우했지만 내 마음이 더 욕심을 낸다면? 어딘가에는 100퍼센트를 충족해 줄 상대가 있을 거라고, 근거 없이 굳건한 믿음을 지킨다면? 그럼 100퍼센트고 95퍼센트고 아무 소용도 없다. 아무 인연도 생기지 않는다. 가능성은 0퍼센트가 되고 만다. 타이밍이 아무리 좋아도 헛된 욕심을 품는 순간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이는 사랑과 인연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타이밍과 욕심의 문제고, 당연하게도 집을 사고파는 것에도 해당된다.

아이의 두 돌을 두어달 남겨뒀을 무렵, 그러니까 집을 내 놓은 지 만으로 1년쯤 되어 갈 때였다. 계절은 봄을 기다리는 늦겨울에서 다시 새해를 앞둔 한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대작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이른바 톱배우들을 넷이나 한 자리에 모아야 하는 화보 및 인터뷰 건이 내 담당으로 잡혔다. 조율해야 할 것들은 끝이 없었다. 배우 측 매니지먼트와 영화사는 물론 포토그래퍼, 스튜디오, 헤메스 스태프들과의 통화가 줄지어 이어졌다.

영화사 관계자와의 통화를 마치고 나자 내 얼굴과 핸드폰 모두 잔뜩 열이 올랐다. 뜨거워진 볼을 한 쪽 손으로 감싸고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놓자마자 신랑에게서 전화가 왔다. 곧 배우 매니저에게서 연락이 올 참이었으므로 나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왜? 나 통화 길게 못 해.”

“그럼 용건만 간단히. 우리 집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

“진짜야?”

영화사와 열변을 토하며 통화했을 때와는 다르게 높은 톤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어. 그런데 문제가 있어.”

“뭔데?”

“신혼부부인가봐. 그런데 대출 문제가 있어서 딱 6억에 해 주면 안 되겠냐고 하네.”

우리가 내 놓은 가격은 6.3억이었다.

“안 돼.”

나는 단칼에 대답했다. 긴 통화로 달아오른 열이 한 순간에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그렇지?”

“응. 맥시멈 6.1이야. 우리 인테리어도 다 새로 한 집이고, 또 솔직히 말하면 지금 엄청나게 급한 것도 아니잖아. 6은 절대 안 된다고 해.”

“내 생각도 그래. 알았어. 그럼 그렇게 전할게.”

신랑에게 말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렇게 단칼에 거절했던 데에는 지난 1년여 간 계속 집을 보여주며 생긴 오기 탓도 있었을 것이다. 1년 간 거의 매 주 주말을 반납해 가며 집이 팔리길 기다렸는데, 6억이라니 턱도 없는 소리였다. 아직 팔리진 않았으나 여전히 집을 보러오는 사람은 많았다. 아직 아이가 어렸기 때문에 당장 이 집을 떠나야만 할 이유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여유가 있는 건 우리 쪽이었기에, 대뜸 3천만원을 깎아 달라는 제안은 달갑지 않았다. 6억을 제안한 신혼부부는 6.1은 도저히 어렵다며 포기했고, 그 다음 주말에도 우리 집을 보러 오겠다는 부동산의 연락은 계속됐다.

한치 앞날도 예상치 못하는 게 인생이다. 2015년에 마포 구축 아파트의 가치를 몰랐듯, 2020년에 대출이 두려워 매매 대신 전세를 택했듯, 우리가 또 한 번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건 불과 몇 달 뒤였다. 우리 집과 같은 평수의, 인테리어를 하지 않은 집이 5.7억에 팔린 것이다. 급매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시장에 나와 있던 같은 평수의 집들이 모두 5억대로 가격이 떨어졌다. 우리 집도 대세를 피해갈 순 없었다. 제아무리 인테리어 빨이 있다고 한들 5.9억 이상은 무리라는 게 부동산 소장들의 전언이었다.


그제서야 우리 부부는 후회했다. 6.1억은 무슨. 그 신혼부부가 제안한 6억이 마지막 버스였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또 다시 임신을 하게 됐다. 예정일은 올해 가을이었다.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우리 쪽이었다. 웬만하면 가을 전까지 더 넓은 집으로 떠나야 했다.

여전히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은 많았지만, 여전히 반응은 시큰둥했다. 매스컴에서 ‘역대급 더위’가 몰려올 거라고 호들갑을 떨던 5월의 어느 날, 어린이집에 간 아이를 픽업하러 집을 나서는데 신랑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집 사겠다는 사람이 있대.” 신랑의 목소리에서 흥분이 느껴졌다. 이번에도 신혼부부였다. “웬만하면 맞춰주자. 무조건 팔아야 해 우리.” 불과 몇 달 전과는 정말 대조되는 통화였다.

의외로 이번 신혼부부는 크게 요구하는 바 없이, 약간의 디스카운트 정도에 매수 의사를 밝혔다. 잿밥에 눈이 멀었다가 영원히 집을 못 팔 뻔 했는데, 천만원 정도 깎아주는 거야 전혀 문제가 안 됐다. 구두 합의가 이뤄진 후, 나와 신랑은 옆 동네 뉴타운의 부동산을 슬슬 검색해봤다. 이 집을 산 이래 지난 몇 년간 열심히 아껴 산 덕분에, 약간의 대출만 더하면 신축은 아니어도 구축 30평대는 갈 여력이 됐다. 뉴타운답게 옆 동네에는 초등학교도, 소아과도, 치과도, 카페도, 마트도 많았다. 초등학교 분위기에 대한 평가도 지금 집 옆에 있는 초등학교에 비하면 훨씬 후했다. 계약을 체결하는 순간 바로 옆 동네 부동산으로 달려갈 생각에 우리 부부는 잔뜩 들떴으나…

다음 날 우리는 청천벽력의 소식을 들었다.

“아니, 뭐 그런 사람들이 다 있어. 내가 미안해요. 내가 그 오랜 시간 부동산 하면서 이런 경우는 정말 난생 처음 본다.”

부동산 소장이 설명해준 상황은 이랬다. 집을 사겠다던 신혼부부가 은행에 가서 상담을 받았더니 생각보다 대출이 적게 나와 도저히 집을 살 상황이 안 됐다는 것이다. 그들이 대출을 한도까지 끌어 모으고 양가의 도움을 최대한으로 받아도 지불 가능한 금액은 5.3억이라고 했다.

지난 번 6억 사건의 교훈 및 둘째 임신으로 우리 부부의 기조는 ‘웬만하면 맞춰 줘서 팔자’였지만, 5.3억은 조금 심했다. 진짜로 그 부부가 예상보다 대출 한도가 적게 나온 건지, 아니면 똥배짱을 부려 본 건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5.4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금액이었다. 첫 번째는 우리의 욕심이, 두 번째는 상대의 실수가 적절한 타이밍을 완전히 날려 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지금은 집을 팔아서는 안 되는 때인 건 아닐까? 지금은 웬만해서는 이 집을 떠나지 말라는 조상신의 시그널인 건 아닐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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