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몰입 2022 03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화영 Oct 30. 2022

육.사.이.이.사.육.

십리를 넘어서도 발병나지 않고 가려면 힘을 빼고 유영하듯 가야한다.


" 오늘은 근력, 지구력 테스트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보통 수영선수들이 많이 하는 흔한 연습인데 우리도 한번 해볼까해요. 

  ‘육.사.이.이.사.육’ 이라고 피라미드 형태로 올라가고 내려오는 것을 반복하는 겁니다. 

  예상하시는 데로 여섯 바퀴, 네 바퀴, 두 바퀴, 좀 쉬고서 두 바퀴, 네 바퀴, 여섯 바퀴     

  이렇게 수영장 레인을 돌아오시는 거에요. 

  대신 힘을 조절하셔야 해. 바퀴 수가 많으면 힘을 칠십 프로만 쓰시고 바퀴 수가 적을수록 

  힘을 백 프로에 가깝게 내셔야 해요. 

  그래야 효과가 있어요. 아셨죠?"



구수한 사투리가 절반 섞인 목소리로 부담스러운 설명을 이어가는 수영 강사. 나는 속으로 ‘아니요, 모르겠어요, 모르겠는데요, 반사요!’ 외쳐보면 뭐하나. 주황색 물안경에 가려져 의사소통도 안되는데. 물안경을 투명으로 바꿔야하나. 그건 너무 웃기잖아. 눌린 살과 눈이 작은 물안경 사이에 옹기종기 끼어 들어간 우스꽝스런 모습이라니. 너무 적나라하잖아. 뇌에 오만가지 생각이 뛰놀 때 즈음, 이미 첫 주자가 출발했다.    

 

오늘 출석한 화/목반 아홉 시 수영 고급반은 총 네 명이다. 매일반 메이트들 사이에서 나는 혼자 주 2회다. 그래서 수영 실력이나 스피드와 상관없이 늘 가장 뒤에 선다. 매일 연습을 반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리 날고 기어도 운동량이 그들의 절반도 못 미치는 내게는 지금 위치가 딱이다. 피라미드 운동의 영법은 자유형. 25미터 끝에 도착할 때마다 몸을 수달처럼 재빠르게 훽 돌려 순서가 끊기지 않고 돌아야 한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건 아니지만 끊기지 않고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고급반은 왠지 그런 사람들이 수영하고 있어야 할 법 했으니까. 내가 여태 봐온 수영 고급반은 늘 그랬다.      


수영을 하면서 한 번도 뒷줄에 서 본 기억이 없다. 수영 좀 해본 여자라는 의미다. 초등학교 3학년, 엄마 손에 이끌려 동생과 시작한 수영은 거칠었다. 호랑이 남자 선생님이 관건이었지만 어릴때부터 ‘못하겠어. 힘들어. 도와줘’라는 말에 익숙하지 않았다. 도움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고 스스로 해내고 성취하는 일이 친숙했다. 생각보다 성취도도 높았다는 생각이 든다. 성취도가 낮았다면 하기 싫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거나 어리광을 부렸을텐데 그런 기억이 별로 없다. 시도 한 일에서 이렇다 할 실패를 해본 어릴적 기억이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부모님 눈이 뒤집어질 만큼 공부를 잘했다던가 운동과 책을 미친 듯이 파고든 아이는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올백(전과목 백점)과 상장 몇 개, 전교 1등쯤은 다들 해보지 않았던가. 30년 전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 시절은 그랬다. 지금처럼 선행수업이 과열되거나 치열한 상장 경쟁으로 과열지역은 교내 대회 시상식조차 없앤 그런 풍경이 아니었다. 최선을 다한 일에 공공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비교적 너그러운 시절이었다.    

  

수영 실력이 무르익어갈 즈음 호랑이 선생님이 둘씩 짝을 지어 25미터 안에서 수영시합을 시켰다. 다들 비슷한 체격에 비등비등한 실력으로 매칭을 해줬다. 그러나 내게는 당시 중학생은 되어 보이는(실제 몇 학년이었는지 모른다) 오빠와 시합을 시켰다. 당시 나는 1학년 1반에서 가장 키가 큰 여자 아이였다. 그래도 키가 1.5배 이상 큰 사람과의 조합은 반칙이 아닌가. 같은 레인 안에서 자기가 갔던 방향을 그대로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그는 접영, 나는 자유형이었다. 1학년보다 큰 키로 이미 길이에서 우위를 득점한 그가 두 발을 모아 발을 첨벙이면 내가 숨을 쉬러 고개를 돌릴 즈음 그 물이 내게로 몰려왔다. 좁은 틈에서 오빠의 거침없는 물장구 폭격에 폭풍 물싸다구를 맞았다. 영화에서 보던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공포가 이런 것일까. 공기를 교체할 틈도 없이 물로 메워지는 숨쉬기는 배불리 물을 받아 마시며 코가 매운 뜨거움이 절정에 이르러서야 마무리됐다.      


교내 수영대회에서 5학년 때 평형으로 1등을 한 후로는 취미로 근근이 수영을 이어왔다. 결혼하기 전에는 친정엄마와 동네 수영장에서 같이 새벽 수영을 했었다. 첫째 재모가 태어난 뒤 백일 즈음, 새벽 수영을 한 번 간 뒤로는 남편 회사의 출근 전 회의가 생기면서 기회가 사라졌다. 거의 10년 만에 다시 수영장에 몸을 담그는 설렘과 흥분은 시작 1주일 뿐. 2주 차에 접어드니 강도는 점점 높아졌다. 그중 하나가 업그레이드되는 시점에 피라미드 훈련이 시작됐다.      


첫 바퀴는 처음이니까, 두 번째 바퀴는 두 번째니까. 세 번째 바퀴는 꾸역꾸역 쥐어짜서 넘기고 네 번째 바퀴는 턴 하는 시점에서 10초가량 쉬고 이어간다. 다섯 째 바퀴는 바퀴수를 잃어버린 채 앞 사람 발만 쳐다보며 팔을 휘젓는다. 여섯째 바퀴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숨쉬기에 맞춰 가다 보면 멈춰선 일행들이 보인다. 그러면 여섯 바퀴가 끝난 것이다. 5분 정도 숨쉬기 후 다시 시작된 네 바퀴. 이젠 바퀴수를 세기보다는 영법에 집중한다. 물 잡고 어깨를 밀고 팔이 바뀔 때 허벅지까지 다리를 이용해 발차기를 하면서 팔과 다리의 리듬에 맞춰 부스팅을 하고 호흡을 최대한 거칠지 않게 조정해 평온한 숨쉬기가 되도록 호흡과 페이스를 조절하자. 물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으로 전념하다가 피라미드 훈련이 막바지에 이르면 완성되어 간다는 희열보다도 딱 두 가지로 생각이 멈춘다.      


‘한 바퀴만 쉴까?, 아니면 그냥 옆 레인으로 넘어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도망칠 수 있을 때 ‘얼른 도망가’라는 신호와 생각을 비우고 ‘그냥 해’라는 신호가 서로 교신하기 바쁘다. 오십 대 오십의 신호가 교차하는 순간 스물 네 바퀴가 마무리된다. 물속에서 타오른 얼굴은 검은 수영모를 두고 불탄 군밤처럼 흑빛으로 달아올랐다. 차가운 물 안에 있지만 몸은 이글거리는 것이 불구덩이 쏘시개가 된 듯한 기분이다. 더욱이 공복에 강도 높은 유산소는 이명 직전은 아니지만 머리에 쥐가나는 듯 알싸한 느낌을 선사한다.      


수영으로 탈진한 신체와 마주하는 오전은 말 그대로 무념, 무상이었다. 주유소를 들렀다 집으로 돌아오니 오전 10시 57분. 11시 이후에 첫 끼니를 시작하는 시간과 절묘하게 맞았다. 오전에 남은 잔업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간이지만 지친 신체가 본능처럼 소파로 향한다. 예전 같으면 아이들이 식탁 위에 늘어놓은 초콜릿이나 과자를 오물거리며 냉장고를 기웃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야무지게 운동한 직후라서 대충 아무거나 몸속에 넣을 순 없었다. 미리 삶아둔 달걀, 연두부, 과일 조금과 토마토, 야채, 아몬드 우유를 부지런히 씹어 삼켰다. 왠지모를 적막함에 라디오를 켰다가 끄고 TV를 틀었다. 채널을 몇 번 돌리다가 고정하게 된 예능프로그램에 합창단 지휘자가 나왔다.      


독일 도르트문트 합창단 지휘자라고 소개된 한국 여성. 독일 합창단에게 1년 동안 아리랑을 들려주고 연습해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한 후 적극적으로 아리랑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게 되었다고. 독일 합창단에게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을 소개할 때 애국가 대신 아리랑이 울려 퍼지는 영상을 통해 분단국가인 한국의 상황을 잘 설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더불어 한국어로 아리랑을 의미를 생각하며 부를 수 있는 이해를 도왔다고. 청아한 피아노 연주에 독일 합창단원의 목소리로만 전해지는 아리랑은 곱고 아름다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동양인이 지휘하는 아리랑 속에 푸른눈과 노란 머리칼, 검은 피부에 레게 머리를 한 합창 단원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독일에서 아리랑 합창이 끝나고 나면 제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 주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특히 타지에서 살면서 한국어로 아리랑을 들을 수 있다니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이라고들 해주셨어요. 

  우리 사는 모습이 딱 아리랑 같아요.”     


사는 모습이 딱 아리랑 고개를 넘는 것 같다는 지휘자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남편이 읽어대던 논문 속 예언처럼 심신이 탈진해 맑아진 정신을 파고든 교감신경의 활발한 움직임이었을까. 사는 모양새가 크게 다름이 없다는 말이 생각보다 큰 위로와 울림으로 다가왔다. 삶은 늘 고개를 깔딱이며 넘어가는 일의 반복이고 시절의 좋음은 허망하게 흐른다. ‘지금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불변의 진리는 아쉬움과 안도라는 공평한 양 갈래 물길처럼 막힘없이 흐른다.     


 “나중에 수영할 때 피라미드 훈련을 지속하다 보면 팔과 손이 기계적으로 돌아가요. 

  그제서야 몸에 힘이 빠지고 자연스러운 수영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삶에서 수많은 물장구를 치며 앞으로 나가다가 멈추기도 하고 매일 놓인 사소한 도전을 무방비하게 받아들이며 산다. 몸에 진정한 힘을 빼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긴장으로 잔뜩 움츠러든 근육을 이완하며 살아야 한다는 지혜처럼 들렸다. 십리를 넘어서도 발병나지 않고 가려면 힘을 빼고 때로는 유영하듯 즐기며 갈 수밖에. 무게가 덜어진 움직임으로 유유히 가는 것이 유일한 사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이전 02화 나이 한 살에 만 원씩 쓸 자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