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향으로 무장한 적군(敵軍)이 나타났다. 처음 등장한 인물은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가며 에잇솝(Aesop)테싯 향을 약 70 ppb 정도로 뿜었다. 향이 조금 강렬했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경우 기분 좋은 아군(我軍) 내음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이어서 등장한 씬스틸러 커플은 방금 전 다잇소(Daiso)에 들러서 똥파리가 좋아할 만한 장미향과 돌고래가 생각나는 아쿠아 방향제를쏟고 왔는지 120 ppb를 훌쩍 넘기는 화생방 공격을 시도했다. 환절기 비염으로 지친 내 비강과 인후에게 가혹한 시간이었다. 스벅 금단 현상을 조절하기 위해 무료 쿠폰을 긁어모은 뒤 침투한 별다방에서 사용 가능한 유일한 제독제는 검정 물 특유의 뜨거운 향뿐이었다. 당연히 효과는 미미했다.
적군이 점령할 목표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하나둘씩 늘어나며 분대 급으로 확장하자 커튼콜이 끝날 때 아쉬움을 담아 쏟아내는 환호성처럼 강력한 박수와 함성으로 우리를 공격했다. 소음은 이미 100dB(열차 통과 시 철도 변 소음)에 육박했고 그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존재감을 과시했던 옆자리 용병 네 명은 언제부터인지 음소거 화면으로 보였다. 외이도염으로 고생 중인 왼쪽 귀를 통해 수집한 소리는 분명 신호가 아닌 소음이었다. 결국, 역습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최상의 전투력을 보유한 막무가내둘째 똥파리를 긴급 출동시켰다.
평소 주변에 민폐를 끼칠까 봐 갤럭시 탭 음량 조절에 신경 썼지만, 자유롭게 풀어놓는 방임 전술을 부렸다. 어차피, 둘째가 즐겨보는 알쏭달쏭 티니핑은 80dB(지하철 차내 소음) 정도라서역습이 쉽지 않았지만, 다른 음역대에서 발산하는 노키즈존 생성 옥타브로 집중 공략했다. 그래도 작전 목적은 명확했다. 각자의 소음에 신경 쓰는 시간을 가지도록 유도하는 점잖은 전술이었다. 결국, 우리 집 똥파리가리액션까지 더하여공격하자적군은전투피해가 발생했고 전세까지기울었다. 하지만, 그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씬스틸러 중 한 명이 돌고래처럼 강력한 주파수로 역대응하며증원을 요청하기시작했다.
어느새 스무 명에 가까워진 무리는 돌고래 소대장을 필두로 소음 전투 주도권을 가져갔다. 더 이상교전은 서로에게 막대한 피해를 줄 게 뻔했기 때문에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쪽에서 일방적으로 꼬리를 내렸다. 문득 지난달 열심히 써서 발행한 내 소중한 글 쇠기러기가 떠올랐다. 그들은 쇠기러기가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보금자리를 만들듯이 주변 의자를 열심히 옮기며군락지를 넓혔다. 괴성을 지르는 돌고래 소대장 지시에 따라 이쪽저쪽에서 발향하며 거친 날갯짓으로 춤사위까지 보였다. 박수와 함성은 여전했는데, 찌그러져 있던음소거 용병은 이미철수한 상태였다.
자세히 보니 적군은전투복도 화려했다. 알록달록 예쁜 옷을 입고 출동한 우리 집 둘째의 퍼플 저지는 SD급(2000년 이전 표준화질)으로 봐도 선명한 텔레토비의 보라돌이 같았고 11월임에도 불구하고 산뜻한 민트색 반팔티셔츠를 입은 아내는 12년 전 특공무술 시범단의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돌고래 소대장의 레이스가 달린 골프웨어는 한때 화려함을 상징했던 EXR이 생각날 정도로 다채롭고 수려했다. 8K UHD(요즘 최고 화질)로도 소화하기 어려울정도로눈이 부셔서 도저히 직관할 수 없는 상태였다.직관을 회피하고 싶어서 내 의자 위치를 여러 번 바꿨지만, 전장을 넓힌 적진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다행인 건 요즘 노안으로 눈이 침침했던 덕분에 직접적인 안구 공격은 막아낼 수 있었다.
완전한 패배였다. 삼십 분간의 처절한 전투로 우리는전투력이 바닥났고 결국 생존을 위해서 후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휴전을 선언한 뒤 어렵게 침투 한 별다방에서 예상하지 못한 오감 빌런에게 눈코귀를 마비당하며 처참하게 패배했다. 침통했지만 우리의 굳은 결심을 도와준 적군 덕분에 별다방과 작별이 수월해졌다고합리화하며 전력을 재정비했다.그렇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