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에 이어, 나는 나이아가라 폴스뷰 카지노 호텔의 이탈리안 파인다이닝에서 일하면서 요리사로서 전문성을 더 갖고 싶었다. 그래서 레드실(Red seal)이라는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레드실 자격증은 캐나다 정부(The Council of Directors of Apprenticeship, CCDA)에서 승인하는 국가공인 기술표본으로, 대개 3년 이상의 실무 경력이 있어야 응시할 수 있으며, 직종에 따라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이 부과되는 국가 기술자격시험이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저절로 얻게 되는 졸업장이나 전문학사 자격과는 별개로, 요리를 비롯한 다양한 기술직에 종사하는 이들이 본인의 전문성을 캐나다 정부에서 공인하는 자격증으로 인정받는 시험이다. 영문으로 된 요리책을 몇 번이나 완독 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서양요리 특성상 많은 프렌치 용어도 외워야 했고, 일을 하면서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자격증을 꼭 따고 싶었기에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직장에서 나의 슈퍼바이저들도 내가 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알고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에 파인다이닝에서 일을 하고 싶어서 블랙박스 챌린지에 지원했을 때, 그 많은 직장 내 요리사들 중에 지원자가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놀라웠는데, 이 시험을 개인적으로 준비하는 요리사들도 많지 않아서 내 위의 셰프들이 당사자인 나보다 더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것 같다. 왜냐하면, 레드실 자격증 소지자는 업무 현장에서 공인된 숙련자(Journeyman)로서 직급 체계에 따라 다른 직원들에게 업무지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라인쿡 직급에 안주하지 않고 매니저 포지션을 위해서 그렇게 한발 한발 준비했고, 결국 이 시험을 거쳐 캐나다 국가 공인 레드실 자격을 취득했다. 혹시 관심 있으신 분들은 아래 사이트를 참고하기 바란다.
카지노 호텔은 상당히 큰 조직이라 셰프의 직급도 세분화되어 있었다. 그중에 캐나다 나이아가라의 두 개의 카지노를 전체 총괄하는 셰프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레이였다. 총괄셰프 레이는 자주 보기도 힘들뿐더러 항상 바빠 보였다. 많은 직원들이 레이의 결제를 기다리고 있었고, 키친에서 요리를 하기보다는 두 카지노 전체 요리 감독과 모든 식음료에 관련된 행사 총괄을 하며 돌아다니는 모습을 더 많이 보았다. 그리고 가끔씩 요리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큰 행사나 VIP손님들의 요리를 주로 했고, 먼발치에서 셰프를 바라보며 그가 하는 멋진 요리와, 요리뿐 아닌 셰프로서 총괄하는 모습이 참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셰프 레이 테일러 (왼쪽) @김혜리
셰프 레이는 영국에서 태어나 런던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클라리지스 호텔(Claridge’s Hotel)과 런던의 사보이 호텔(Savoy Hotel, London)에서 훈련을 받고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최연소 셰프 드 파티 소시에르를 거친 후, 캐나다로 이주하여 토론토의 더 옴니 킹 에드워드 호텔 (The Omni King Edward Hotel)의 Ciaros 레스토랑을 이끌었다. 그 후 캐나다 빅토리아, 에드먼턴, 토론토 페어몬트 호텔, 웨스틴 하버 캐슬 등 캐나다 전역의 수많은 어워드 위닝 레스토랑의 총주방장을 역임했으며, 아틀란티스 바하마 나소의 럭셔리 리조트 디 오션클럽에서 숀 코너리, 셀린 디옹, 오프라 윈프리 등 많은 셀러브리티들을 위해 요리하며 Condé Nast Gold List에 오르기도 했다.
영국의 Roux Brother Young Chef 대회에서 우승하고 수많은 요리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했으며, 영국의 찰스 왕세자와 故 다이애나비의 왕실 결혼식 리셉션 요리사,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과 필립 왕자를 위한 요리사 중 한 명으로 발탁되었다. 두바이에서는 두 개의 분자요리 팝업 레스토랑을 성공적으로 오픈하였고, 내가 근무했던 나이아가라 카지노에서는 13년 이상 총주방장을 지냈다.
나는 카지노 안의 파인다이닝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가끔씩 우리 키친에 찾아오는 셰프레이와 더 자주 마주치게 되었고, 내가 레드실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레이의 귀에도 들어갔었던 것 같다. 그래서 왜인지 그 뒤로 셰프 레이와 마주치는 일이 더 많아졌다.
나는 평소와 같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셰프의 테이블(Chef’s Table)이라는 총괄셰프와 함께 VIP손님들의 요리를 하는데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새로운 재료와 요리를 접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다. 그래서 셰프 곁에서 열심히 어시스턴트를 했다. 그렇게 점점 셰프 레이와 일을 하는 날도 더 잦아졌다. 나는 셰프가 요리를 예술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창의력이 참 마음에 들었다. 총괄셰프와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도 나로서는 영광스러운 일이었는데, 요리에 대한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서, 참여하는 행사마다 최선을 다했다. 셰프는 나에게 창작요리를 할 기회를 많이 주었다. 아니, 나의 창작요리를 보고 싶어 하는 듯했다.
나는 셰프이자 디자이너이기도 하기 때문에 캐나다에 와서 처음 요리를 직업으로 접하면서 요리에서 예술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이 나를 지금까지 요리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짜인 메뉴를 매일 반복해서 만드는 것보다 내가 직접 창작하고 메뉴개발에 참여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나에게 창작의 기회가 주어지니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연구를 했다.
미장 플라스 Mise en place @김혜리
여러 이벤트 모습과 셰프의 테이블(Chef’s Table) 요리 중 @김혜리
한식에 대한 관심
내가 캐나다 요리학과에서 공부하는 동안, 세계의 수많은 요리를 접하게 되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건강에도 좋고 맛있고 보기에도 좋은 한식요리가 정말 많은데, 요리학과에서 다른 아시아 요리는 가르치면서 왜 한식은 많이 언급되지 않는 것일까. 아마도 한국 요리가 아직 교재에 실릴 만큼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일까라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움을 많이 느꼈다. 물론 예전에 비해 한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한식을 좋아하는 외국인들도 많아지기는 했지만, 바라건대 전 세계 요리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재에 다양한 한식 요리가 당당히 소개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때부터 한식에 대한 나의 관심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내가 비록 서양에서 요리를 하고 있지만, 나의 뿌리 음식을 더 깊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틈틈이 한식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을 늘 가지고 있던 나에게 어느 날 셰프가 VIP 손님들을 위한 코스요리 중 몇 가지 코스를 직접 창작해 보라는 숙제를 주었다. 나는 밤새 요리를 구상하고 계획을 그림으로도 표현해 설명했다. 여러 가지 창작요리들 중 한식을 소개할 수 있는 메뉴들도 넣었는데, 이렇게 셰프 레이와 함께 준비해 선보인 셰프의 테이블(Chef’s Table) 코스요리에서 여러 국적의 사람들에게 매우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더욱더 용기를 얻어 고유한 한식 또는 서양요리와 한식을 접목한 요리들을 개발해 나갔다.
내가 이곳에서 일을 하면서 좋았던 점 중 하나는 바로 팀워크였다. 직장 안에서의 팀워크도 좋았지만, 업무 이외에 *F.O.H, B.O.H 직원들이 함께 와인 공부를 위해 토론토에 있는 와인 페어에도 다녀오고, 쉬는 날에는 종종 함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식사 봉사활동도 했다.
*F.O.H (Front of house): 접객부서, 손님들과 직접 접촉하는 부서
B.O.H (Back of house): F.O.H의 반대의미, 손님들과 직접 접촉하지 않는 부서 (키친 외)
캘리포니아 와인페어 (토론토)
페어몬트 로열 요크 호텔 토론토 Fairmont Royal york hotel Toronto @김혜리
캘리포니아 와인 @김혜리
셰프들과 식사봉사활동
나이아가라 폭포 숩키친에서 식사봉사활동 Niagara falls Soup Kitchen
셰프 레이의 오피스에는 요리서적도 참 많았다. 어느 날, 셰프의 오피스에 방문했을 때, 책에 대해 이야기를 했더니, 셰프가 나에게 요리서적을 빌려주었다. 일부러 구매하지 않으면 자주 볼 수 없는 책들도 많이 있어서 기분이 특별했다.
야생식물공부
캐나다의 식용 야생식물들, 산마늘 / 명이나물 Wild Leek / Ramp @김혜리
그러던 어느 날, 셰프들과 요리를 위한 야생 식재료를 공부하러 근처에 야산에 갔을 때인데, 셰프 레이도 동행했다. 여러 가지 식물들을 보고 한 수셰프로부터 식재료로 사용해도 되는 야생식물과 먹지 말아야 할 야생식물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셰프 레이가 내 곁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야기인즉슨, 본인이 어떤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뜬구름 같은 이야기에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뒤, 레이가 나에게 한 제안은 정말 놀라웠다.
오랫동안 계획했던 자신의 인생 첫 번째 레스토랑을 나와 함께 열고 싶다는 것이었다. 레이는 그동안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지켜보며 나에 대한 확신을 가져 나갔던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셰프 레이의 첫 번째 파인다이닝의 수셰프(부주방장)로 가게 되었다. <Farm to table & table to soul>이라는 모토 아래 신선한 현지 유기농 식자재로 건강한 요리를 선보이는 프렌치, 캐내디언 레스토랑이었다.
치열하게 들어왔던 만큼 많이 정든 키친을 떠나는 것이 아쉽고 슬프기도 했지만, 나는 그렇게 또 다시 내 요리 여정의 새로운 챕터를 시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