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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태리 Dec 04. 2022

분홍색 장갑을 고르는 남자

서울 둘레길 가양대교남단~증산역

갱년기로 깊은 잠을 못 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요일 아침 홈카페를 차려 먹고, 나갈 준비를 한다. 화섭 씨와 둘레길을 걷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졸려도 해가 뜨면 움직이는 게 불면증 치료에 좋다.


오늘은 가양대교 남단에서 시작한다. 가양역 밖으로 나오자 찬바람이 분다. 우리는 걸어서 가양대교를 건널 예정이다. 맨손으로 온 화섭씨가 어깨를 움츠리며 두 손을 재킷 주머니에 넣는다. 이리 걷다간 넘어질 수 있어 다이소 가서 장갑을 사기로 했다.



남색 바탕에 하얀 눈꽃 무늬가 있는 걸 골랐다. 계산하려 하니 잠깐만~ 하며 분홍 것을 골라온다. 핸드폰 터치 기능 있는 걸 써야 한단다. 큰 덩치에 귀여운 색을 골라오니 웃음이 나온다.


든든하게 장갑을 끼고, 가양대교 위로 올라섰다. 한참 지나다 작은 횡단보도가 나온다. 버튼을 누르면 조금 있다 소리가 나며 초록불로 바뀐다. 이 소리가 재밌어 횡단보도가 나올 때마다 버튼을 눌렀다.



길은 얼음이 껴 있었다. 벌써 올 한 해 마지막이구나. 찬바람이 연말을 알린다. 가양대교를 다 건너니 난지도 공원 옆 메타세쿼이아 숲이 나온다. 버스정류장에 어느새 비닐로 쳐진 온기 쉼터가 보인다. 여기서 잠시 찬바람을 피해 지도를 봤다.



우리 친할아버지는 통영의 마도로스셨다. 먼바다를 나가 북한까지 가셨다 한다. 그런데 말년에 멀리 갈 수 있는 일자리가 없어 그럴 기회를 그리워하다 돌아가셨다 한다. 통영 사람들은 드넓은 세상을 모른다 답답해하셨다 한다.


<가족의 두 얼굴>을 보면 윗대에서 못다 이룬 꿈이 dna로 전해져 아랫대에 내려온다 한다. 그래서, 화섭 씨와 내가 멀리 걷는 걸 좋아하나 쉽다.


문화비축기지에 도착해 화섭씨는 기계가 끓여주는 라면 한 그릇 때리고, 나는 상암댁이라는 친구에게 안부전화를 했다.

월드컵 경기장을 지나 불광천을 따라와 오늘의 목적지인 증산 체육공원까지 왔다. 추운데도 졸린데도 걸어서 보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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