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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태리 Sep 06. 2020

쌍문동 막내, 세상에 통째로 맡기다

있는데 없다고 할 수 없다.

<어항속의 금붕어 / 캔버스에 아크릴 / 45×53 / 2012,8 : 김우진 작가(자폐성 2급)>






1978년 우리 가족은 쌍문동으로 이사왔다. 부모님께서 집을 사신것이다. 그해에 화섭씨가 태어났다. 나는 국민학교를 가고, 화섭이외에 동생도 둘이나 되어 아버지는 돈을 벌고, 식구를 먹을것 하느라 엄마는 엄청 바쁘셨다. 쌍문동 집 동네밖을 나가면 논과 밭이 있었다. 엄마는 한켠에 옥수수를 심었다. 밭에서 배추벌레도 보고, 들과 산으로 뛰어 다니고 서울이었지만 시골아이처럼 컸다.


그렇게 살다가 화섭이가 4살이 되었을때 엄마는 일반 아이들과 화섭이가 좀 다르다는걸 알게 되셨다. 병원에 가서 이름도 생소한 [자폐]라는 진단명을 받아오셨다. 그후로 엄마는 화섭이를 데리고 머나먼 병원들로 치료를 받기 위해 다니셨다. 한미병원이라는 이름도 기억난다. 어느날 종이에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가져와 엄마는 화섭이에게 뭔가를 가르쳤다. 레슬링도 하며 화섭이랑 스킨십을 많이 하셨다. 화섭이에게 이런 저런 동화를 엄마는 들려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온갖 엄마의 관심은 화섭이에게만 집중되고, 나머지 세 남매는 알아서 혼자서 크는것이 암묵적인 가족 룰이 되었다.



화섭이는 무언가를 나열하는걸 좋아했고, 같은 노래를 반복해 부르는걸 좋아했다. 당시 백구의 대제전이나 농구대잔치처럼 스포츠 중계 열풍이 불었는데, 그 배구장이나 농구장처럼 신문을 반으로 접어 삼각형 모양으로 세워 광고부분이 보이게 만들어서 광고판을 만들었다. 그걸 죽 나열해놓고 혼자 웃고 놀았다. 가끔 괴성을 지르긴 했지만, 혼자 웃고 노는건 우리에게 별로 피해를 주지 않았다. 난 엄마가 막내를 많이 보살펴야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걸 어려워하기 시작했다. 다 같이 목욕을 가면 나는 혼자 때를 밀고 엄마에게 나는 다 했다고 말하곤했다. 나중에 이런 삶의 태도가 남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친밀한 일대일의 관계를 만들어가는데 장애가 된다는걸 알았지만, 난 어쨌든 그때 자발적 착한 아이가 되곤했다.그건 나머지 남매들도 마찬가지였던것 같다. 소리없는 약속이었다.



사실 이런건 별로 힘들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힘든건 화섭이가 다리가 건강해져 툭하면 집밖을 뛰쳐나가기 시작했을때다. 우리엄마는 개방적 부자집에 손님이 바글바글 하는 환경에서 자라셨다. 문을 잠가두지 않고 셋방사는 사람들도 자유로이 드나들게 했다. 그게 함정이었는지 화섭이는 툭하면 집밖을 뛰쳐나가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동네 아이들이 집에 당도하기도 전에 "네 동생 또 나갔어."라고 알려주었다. 그럼, 온 동네를 다니며 화섭이를 찾아야했다. 화섭이가 없어지는것보다 아버지가 화를 내는게 무섭고 싫었다. 어쩔땐 하룻밤을 꼬박 세워 안 들어올때가 있었다. 누군가 알려주어서 동대문 미아보호소에서 화섭이를 찾아온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노발대발 화를 내며 엄마를 질책했다. 애를 묶어 둘수도 없었다. 엄마가 집안일을 안할수도 없었다.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엄마가 평안하게 일을 하고 계셨다. 화섭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냐고 하니 엄마가 놀러나갔다고 괜찮을거라고 했다. 얼마 안 있어 집에 전화가 왔다. 길가던 사람이 화섭이를 보고 이름표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준것이다. 엄마를 화섭이를 통제하지 않고 세상전체에 맡겨버린 것이다. 그 후 엄마는 화섭이를 더 멀리 보냈다. 당시 복지관이 서울에 그리 많지 않아 북쪽의 쌍문동에서 남서쪽의 보라매공원까지 가야했다. 지하철을 타고 혼자 찾아가도록 세상에 화섭이를 또 내보냈다. 뒤에서 쫒아가며 잘 가고 있는지 미행하셨다고도 했다. 다행히 화섭이는 길눈이 밝아 잘 찾아다녔다.




나중에  자폐에 대해 공부하니 충동을 조절하는 전두엽의 이상으로 오는 질환이며 본인의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 특정행동을 한다고 했다. 화섭이의 특정행동은 세상을 돌아다니는것이었다. 걷고 뛰어다니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할수도 있다. 장애가 있는 애를 뉴스를 보면 험한 일이 많은 이 세상에 통째로 맡겨버릴수 있을까? 엄마는 평생 이 아이를 통제할수 없다는걸 깨닫고 그리 하셨다 하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한 용기이다. 나중에 우리 엄마 사주를 보니 직관력이 뛰어난 술토가 3개나 있었다. 논리적인 생각보다 문제해결을 직관적으로 하신다. 이유없이 그러면 될거 같아서 그리 했다고 하신다. 나중에 몇몇 자폐장애자녀를 둔 엄마들이 우리엄마에게 [세상에 내보내기] 기술을 배우러 오시곤 하셨다. 지금도 화섭이는 휴일에 집에 있지 않는다. 이 넓은 세상을 복지혜택이 되는 교통카드로 공짜로 즐기고 다닌다. 주로 가는 곳은 서점과 복권파는곳. 나중에 장애인 시설에 봉사를 나가 다른 자폐장애인들을 보고 언어도 안되고, 혼자서 다닐 수 없는걸 보고 우리 엄마가 얼마나 높은 수준까지 화섭이를 교육시켜놨는지 알게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우리를 제일 힘들게 했던것은 [무지와 알수없음]이었다. 왜 화섭이가 저런 행동을 하는지 어른들도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무질서와 갈등과 혼동의 일상이 언제 끝나는지 알수 없어 힘들었다. 아버지는 무엇이든 엄마탓을 하기 일쑤였다. 밤마다 너무 많이 싸우셔서 나는 언젠가 우리 부모님이 헤어질것 같았다. 어느날 아침 엄마가 보이지 않았을때, 올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엄마가 떠났구나. 하지만, 엄마는 떠나지 않으셨다. 이런 오랜 고통이 내가 고2때 엄마의 병으로 나타났지만, 정말 불사조처럼 엄마는 살아나셨다. 도망가지도 않고 회피하지도 않았다. 두려움에 숨기지도 않았고 감추지도 않았다.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참 대단한 엄마시다.




최근에 읽고 있는 템플 그렌딘 책에선 자폐장애를 가진 친구들을 크게 세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한다. 부모와 선생님들은 그들의 카테고리를 관찰해서 알아채고 그에 맞는 교육을 시켜 잠재력을 발전시키고 그에 맞는 일을 할수 있도록 키우면 된다고 하신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놀랐던건 자폐장애에 대한 이해와 연구, 그리고 그에 대한 대책이 공론화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 자체가 자폐에 대한 잡지에 연재된 컬럼이라고 한다. 내가 어릴때는 그런 잡지를 본적도 없었고, 우리 부모님이 읽는걸 보신적도 없다. 물론 요즘에는 이런 자료나 세미나가 점점 한국에서도 발달되고 있는것 같지만, 아주 활성화 된것 같지는 않다.



템플책에서 발췌한 내용은 다음 글에 써보겠다.



* 김지선님의 도움으로 김우진 작가의 그림과 함께 글을 올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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