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경기에서 홈런 세 방이 터진 날
나는 야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재미없고 관심 없는 쪽에 가깝다. 사실 생각해 보면, 야구에 그다지 긍정적인 감정이 연합되지 않게 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바로 우리 아빠 때문이다.
아빠는 삼성 골수팬이어서 내가 기억하는 시절부터 쭉 야구 경기에 빠져 살아왔다. 나이 들고서야 아빠와 이런저런 대화도 하고 사이가 괜찮아졌지만, 솔직히 말하면 어릴 때는 아빠와 사이가 별로 안 좋았다. 그 이유 중 하나 야구다.
아빠는 운전 중에도 차 안에서 늘 야구 중계를 틀어놓고 그것에만 귀를 기울였다. 퇴근 후 가족이 다 같이 모여 밥을 먹을 때에도 경기 캐스터의 특유의 중계 톤이 내내 저녁 식사 자리에 맴돌았고, 나는 그 때문에 아직도 스포츠 경기 중계 소리를 지긋지긋하게도 싫어한다. 삼성이 야구 이기는 날에는 아빠 기분이 좋은 날, 삼성이 지는 날은 아빠 기분이 최악으로 치닫는 날이었다. 그런 날은 괜히 화풀이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도 아빠를 건드리면 안 됐다. 스포츠를 극단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이유 모를 반감도 이때부터 차곡차곡 생겨났던 것 같다. 어찌 되었건 우리 아빠는 60대에도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다. 이전보다 화는 덜 내지만. 도대체 야구가 뭐길래.
상황이 이렇다 보니 뉴욕에서 야구 경기를 보는 것에 대한 내적 동기부여는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뉴욕을 간다고 했을 때 남편을 포함한 주변의 남자 지인들은 모두 뉴욕 양키즈 구장에서 야구 경기를 봐야 한다고 적극 추천했다. 보통 주도적으로 여행 계획을 짜는 나이지만, 이 건에 대해서만큼은 굉장히 수동적인 태도로 추천을 그대로 받아들여 야구 경기를 예매하게 됐다. 야구의 본고장이라니까, 뭐 한번 봐주지 뭐. 정도였다.
아니, 근데 야구 경기가 뭐 이리 비싸?
예매 페이지에서부터 놀란 나. 야구 티켓이 생각보다 엄청 비쌌다. 1루 쪽이긴 해도 3층인데 한 좌석당 예약 수수료 포함 $150, 약 20만 원가량이 된 것. 친구의 표까지 함께 예매해 주려던 생각이었기에 처음에는 '이게 맞아?' 싶었다. 딱히 아는 선수, 응원하는 팀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큰돈을 투자해 가면서 이 내가 야구 경기를 보러 가게 되다니! 그래도 주말 경기이고 나름 앙숙(?)인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니까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결제하고 잊어버리고 지냈다. (쓴 돈은, 쓸 돈은 생각하지 말자는 주의다.)
뉴욕에 도착해서 며칠 적응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야구 경기장 가는 날이 다가왔다. 뉴욕 양키즈 홈구장인 양키 스태디움은 노스 맨하탄 위쪽 브롱스에 위치해 있다. 평소에 가던 동네가 아니니 버스 노선도 다르고, 지하철 노선도 낯설어서 보러 가는 길이 괜히 긴장되기도 하고 두근거렸다. 지하철을 타니 모든 사람들이 볼캡과 저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진짜 미국에서 야구 경기를 보러 가고 있구나 실감이 났다. 161 St-Yankee Stadium 메트로 역에서 내리자마자 쏟아지는 인파에 섞여 술렁술렁 느린 걸음으로 이동했다.
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같이 지금 경기를 보러 가는 길이구나 생각하니 기대감이 별로 없던 나인데도 왠지 모를 전율이 일었다. 홈구장에서 경기를 하는 것이다 보니 양키즈 팬이 엄청나게 많았고 보스턴 레드삭스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빨간색 커스튬이 왠지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경기 전부터 사람들의 얼굴은 기대감으로 차 있었고, 응원의 열기는 뜨거웠다.
양키 스태디움은 안팎으로 참 멋있는 건물이다. 옅은 베이지 톤의 화강암으로 외벽과 내부 기둥들까지 맞춰져 있었고, (내가 유일하게 가본)잠실 경기장보다 조금 더 개방된 느낌을 주는 건축물이었다. 1층 내부로 들어서면 굿즈 스토어와 하드락 까페가 있는데, 하드락 까페에서 경기 초반까지는 음식이나 술을 먹으면서 경기를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미리 맨하탄 MLB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양키즈 모자를 사 왔던 터라 굿즈를 살 생각은 없었지만, 스태디움 와서 보니 더 다양한 디자인의 볼캡들이 많아서 조금 아쉬웠다. 또 다른 점은 플래그십 스토어에서는 의류인 저지만 프린팅 형태로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했었는데, 스태디움에서는 $15을 주면 30분 만에 볼캡에도 자수로 커스텀을 해준다고 해서 경기 시작 전에 맡겨두었다.(이게 작은 화근이 되긴 했지만..)
친구와 나는 점심을 먹지 않고 1시 경기에 맞춰 간단히 경기장에서 뭔가 사 먹자 하고 온 터였다. 경기장 입장 시 생수병에 든 물을 제외한 음료나 텀블러는 소지할 수가 없다. 음식은 어떤 제한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백팩 등도 소지가 안되고 가방 크기 제한도 있다 보니 여기서 뭔가 사 먹게 하려는 상술인 것 같았다. 역시 자본주의의 중심이다. 매점에는 길게 줄이 늘어섰고, 캐셔들은 주문을 받느라고 목이 찢어져라 "Next!!!"를 외쳐댔다. 우리는 가성비가 맞지 않는 치킨과 프렌치 프라이즈 세트, 그리고 핫도그 하나를 주문해서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뉴욕 방문 후 가장 뜨거운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관중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예매한 자리는 그나마 햇볕이 내리쬐는 반대편 쪽이긴 했지만, 뜨거운 태양 아래에 있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아랑곳하지 않고 각 팀 선수들이 입장했다. 신기한 것 하나는 미국 국가를 부르는 가장 첫 순서에 모두 일어나 모자를 가슴에 얹고 진지하게 경의를 표하는 모습이었다. 또 하나는 경기를 보러 온 은퇴 군인을 소개하고 감사를 표하는 순서가 있는데 마침 이때 왔던 분이 Korean War 참전이라는 설명이 화면에 뜬 것이다. 뭉클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생각지 못한 순간에 미국과 한국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응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꼈던 차이점도 있다. 잠실 경기장에 갔을 때 우리나라는 팀별로 선수들마다 테마곡이 있고, 상황마다 다른 BGM을 틀어주면 그에 맞춰서 팬들이 이구동성으로 응원하는 모습에 놀랐었는데 미국의 응원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진지하게 경기를 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 나라 사람들 정말 야구 좋아하네 싶었다. 같이 구령을 맞춰서 단합하는 느낌은 없지만, 대신 안타를 치거나 홈런을 해서 유리한 상황이 벌어지면 알든 모르든 옆 사람과 소통(?)하면서 하이파이브나 허그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날 경기는 양키즈가 큰 폭으로 점수를 벌리면서 대승한 날이었기에 이런 장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타자도, 투수도, 모두 뛰어난 선수들이었기에 창과 방패의 싸움 같기도 했고, 또 너무 쉽게 홈런을 쳐내는 선수들을 보니 희한했다. 한 경기에서, 같은 선수가 홈런을 3번이나 하는 것을 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내가 경기한 것도 아니건만 흥분되고 뿌듯한 순간이었다. (이 맛에 아빠가 야구를 보는 거겠지?)
모자 커스텀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30분이면 된다는 스태프의 말에 땡볕과 씨름하다가 모자를 찾으러 갔는데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 있지 않았(?)고, 스태프는 미안하다며 다시 30분 후에 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뭔가 느낌이 약간 싸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시 30분 후에 내려갔을 땐, 내가 주문한 것과 다른 색의 실로 자수가 새겨지고 있는 상황을 목격했다.
결국 조금 더 높은 직급으로 보이는 매니저가 와서 똑같은 디자인의 새 모자를 꺼내주고 흰색 실로 바꿔서 다시 그 자리에서 받아가기로 했다. 더운 날 그이도 일하기가 참 싫어 보였고, 나에게도 참 어려운 모자 커스텀이었다. 그래도 인생에 단 한번, 또 언제 양키 스태디움에서 자수를 새겨가랴, 하며 멘탈을 다잡았다. 고된 과정이었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7회 말 즈음, 승세는 뉴욕 양키즈로 확실히 기울었고 관중들은 슬슬 경기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땀에 흠뻑 젖은 상태를 더 이상 견디기 힘들기도 했던 나와 친구도 이제 슬슬 가볼까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과는 14:4로 양키즈의 우승이었다. 뉴욕 양키즈는 그날 이후로 한참 패배의 쓴 잔을 마셨다고 하는데, 난 생각보다 운이 좋은 관중이었나 보다. 시원시원한 홈런과 짜릿한 우승의 맛을 더위와 맞바꾸고 내 두 번째 버킷리스트를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