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르스IRS Jun 24. 2022

나는 왜 내가 싫을까

'I's are special(2) - 내 속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

이 시리즈를 처음 읽는 분들은 아래 글을 꼭 보고 오시길 바란다.

'I's are special - 들어가기 전에(https://brunch.co.kr/@iarespecial/4)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완벽한 걸 좋아한다. 시험을 볼 때 평균이 높은 학생들은 우수하다고 여겨지고 한 과목이라도 점수가 낮아지면 그 학생은 등수에서 밀린다. 공부를 잘하던 아이가 한 과목이라도 시험을 잘 못 보면 그날 부모님의 마음은 무너진다. 회사도 마찬가지. 모든 분야에서 우수한 사원을 뽑길 원하기 때문에 취업준비생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이 뛰어난 능력을 보유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뛰어다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자라왔기 때문에 뭐든지 잘하리라는 기대를 받아왔고 무언가를 못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고 약한 것을 수치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 마음에 '건강하지 않은 완벽주의'가 자리잡았다. 무엇이든지 완벽하게 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고 그것은 필요가 없다고. 나에게 잘하는 것이 있으면 드러내야 하고 못하는 것은 철저히 감춰야 하는 우리가 되었다.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내 안에서 청문회가 열리며 남에게는 하지 못할 심한 말이 오간다. 이것을 우리는 자책이라고 한다.


주위 사람들에게 완벽주의가 있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책을 하는 편이냐고 물어보면 열이면 열 그렇다고 한다. 나와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이다.


나도 우울증을 이겨내고 단단해지기 전까지는 자책을 심하게 했었다. 시험을 봤을 때 높은 점수가 나오더라도 100점이 아니면 스트레스를 받았고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잘하는 것으로 박수를 받을 때면 난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지 하루 종일 나를 괴롭혔다. 매일 촘촘하게 하루 계획을 세워놓고는 그대로 지키지 못했다면서 좌절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괴롭히고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자. 보통 이럴 때는 내 안에서 내가 둘로 나뉜다. 하나는 잔소리하고 비난하는 '엄격한 나'와 그 말을 들으면서 상처를 받는 '혼나는 나'. 여기서 '엄격한 나'는 심리학에서 '가혹한 초자아'라고 한다. 초자아는 쉽게 말해서 양심의 기능을 한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고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자책이 심한 사람들은 이 초자아가 너무 가혹해져서 필요 이상으로 내 스스로를 감시하고 통제하게 된다.


이런 가혹한 초자아는 어디에서 왔을까? 그것은 지나치게 엄하거나 처벌적인 부모에게서 왔다고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인 이무석 박사는 말한다.


초자아는 거세 불안을 느끼는 아이가 부모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부모의 훈계와 교육태도를 배우고 따름으로써 형성된다. 부모가 마음 속에 내재화되어 형성되는 것이다. 부모의 양육방식이 비합리적이고, 지나치게 엄하거나 처벌적일 때, 그런 부모가 내재화되면 어린이의 초자아는 가혹하고 처벌적인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초자아를 갖게 되면 매사에 가혹한 초자아의 비난을 받게 되어 죄책감과 자책, 우울, 열등감에 빠져 살게 된다. 이런 사람은 자기 마음 속에 가혹한 처벌자인 부모를 평생 모시고 사는 셈이다. - 이무석 <친밀함> 중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완벽하길 바라는 것은 사실 우리 부모님이, 혹은 양육자께서 완벽하길 바라셨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들이 우리 마음에 남아서 계속해서 리플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의 사랑이 삶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노력했을 뿐이다. 원초적으로 보았을 때 부모님은 자식이 없어도 생존에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자식은 부모가 없으면 생존에 큰 위협이 되기 때문에 사랑 받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높은 기대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착한 아이'가 되었을 뿐이다.


여기서 글을 멈추게 되면 우리는 부모님 때문에 그렇게 힘든 것이니 부모님을 원망하면서 살면 된다는 결론이 나게 된다. 하지만 부모님은 우리보다 더 마음건강을 챙기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오셨다. SNS도, 스마트폰도 없는, 내 생각, 내 의견을 존중받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오셨기에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잘못이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누군가를 탓하는 것은 밑도 끝도 없어진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대는 것은 부모님께서 (의도치 않게) 심어주신 생각들이라면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출발점으로 돌아가보자.


정말 완벽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을까? 뭐든지 잘해야만 하는 것일까? 정답은 당연히 '절대 아니다'. 단순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적는 글이 아니다. 그냥 우리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을 저번 글에서 증명했다. 우리의 부모님도 우리가 태어났을 때 얼굴이 예쁘거나 무언가를 잘할 것 같아서 행복해하셨던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이기 때문에, '나'이기 때문에 행복해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할 줄 아는 것이 전혀 없고 아무것도 모른다 하더라도 감히 우리가 소중하지 않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그런데 심지어 우리에게는 각자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능력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귀한 것 아닐까.


자책이 심한 사람들은 자신의 단점을 숨기려 하고 감추려 한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자신의 단점이 드러남으로 인해 자신의 가치가 떨어질까봐 걱정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오히려 욕심이 많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단점은 우리가 사람인 이상 나의 가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장점도 똑같다. 장점이 많다고 그 사람의 가치가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신의 단점을 보고 자책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장점으로 바꿔 자신이 가치있는 사람임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짜 용기있는 사람은 자신의 단점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단점이 있어서 기분이 나쁘다든지, 아니면 단점이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든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담지 않고 그냥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단점이 있어도 괜찮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점을 인정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고 건강하게 발전시키는 것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사랑은 내 마음에 드는 면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먼저 자신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도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는 따뜻한 사회가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다음 글에는 '경쟁의 관점'을 벗어난, '함께의 관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가 소중하다는 증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