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불을 걷자 엎어져 버린 밥공기를 주워 담았다. 밥알이 이불에 붙어 손으로 떼어내도 끈적함이 남아있었다. 밥과 스텐 밥공기 두 개를 쓰레기통에 처넣어버렸다. 엄마는 지독했고, 나는 엄마의 아끼는 것들을 발로 차버리고, 헤프게 쓰고, 죄다 버리고 싶었다. 엄마가 악착같이 살수록 나는 더 철딱서니 없이 굴었다.
엄마의 베갯잇 지퍼를 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스무 살이 되자, 엄마는 등록금만 주고 용돈은 아르바이트해서 벌어서 쓰라고 했다. 엄마 친구 딸들은 다 그렇게 한다고 아빠 없이 대학까지 딸년을 보내줬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나는 자식 복도 없지! 딸년 뒷바라지를 육십이 다 되도록 하니, 내 팔자도 더럽지. 너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니?”라고 쏘아붙이면서 아픈 다리를 주물렀다. 엄마는 오래된 관절염으로 걸을 때마다 뒤뚱거렸고, 비가 오거나 날씨라도 궂으면 더 심하게 아프다고 했다. 그런 엄마를 보고도 나는 살을 좀 빼면 걷기가 쉬울 거라고 맞받아쳤다. 그러면 엄마는 “경칠 년, 빌어먹을 년” 같은 욕으로 그 서러움을 대신했다. 나는 질세라, 악을 쓰고 대들곤 했다. 엄마와 딸은 얼굴만 맞대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그러나 오빠는 신신 파스도 사 오고 관절염에 좋다는 오메가 3나 비타민 D, 보스웰리아 같은 약을 구해왔다. 미국 약이 좋다고 필리핀이나 외국 나가는 친구들에게 꼭 엄마 관절염약을 부탁했다. 시간만 나면 다리를 주물렀다. 사랑은 돌고 돌았다. 그 꼴을 보면 나는 더 배앓이 뒤틀렸다.
“엄마, 오빠는 용돈을 받아본 적이 없다던데?”
“그래, 오빠는 용돈 달라고 한 번도 안 했어! 오빠 좀 보고 배워라! ”
“엄마, 그럼 나도 통장 줘! 오빠는 일 년 치 용돈을 한꺼번에 받았다는데? 오백이 담긴 통장을 줬다면서? 돈이 있는데, 왜 돈을 달라고 하겠어?”
“경칠 년! 오빠는 돈복이 있어. 경숙이 엄마가 못 받을 줄 알았는데, 빌려준 돈을 주더라. 그래서 오빠 준거지. 네년은 돈복이 없어, 돈 달라고 할 때마다 곗돈 붓고 주머닛돈까지 싹싹 털어 넣은 날 달라고 해. 그러니 없어서 못 주는 거지!”
엄마는 늘 당당했다. 돈이 없어서 못 주는 건, 돈복 없는 내 팔자라고 했다. 엄마 이야길 듣고 있으면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다. 돈이 없을 때 돈 달라고 하면 짜증이 나겠지. 그래, 나는 돈복도 없고 부모복도 없나 보다. 다 포기하고 심드렁하게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엄마도 나이도 먹었고 어디 가서 일해? 월세 나오는 거로 근근이 사는 거지. 나는 엄마 말대로 없는 집구석에서 태어난 복 없는 내 팔자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베갯잇에서 빳빳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퍼를 열어보니 만 원짜리 지폐 수십 장이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로 봐서는 엄마는 저녁준비를 하고 있다. 언니들과 오빠는 한 시간은 더 있다가 올 것이다. 나는 살그머니 일어나서 안방 문을 소리 나지 않게 잠갔다. 그리고 조용히 창문을 닫고 커튼까지 쳤다. 베갯잇에 들어있는 만 원짜리가 몇 장인지 천천히 침을 묻혀가며 세어보았다.
서른다섯 장.
“삼십오만 원이나 있었네! 씨발.”
나는 욕이 튀어나왔다. 30년 전, 내 나이 스무 살에 삼십오만 원은 엄청난 돈이었다. 그리고 숨을 죽이고 만 원짜리 석 장을 떨리는 손으로 꺼냈다. 엄마 돈을 훔쳐낸 나는 뛰어나갔다.
“밥 차렸는데, 어딜 또 나가?” 엄마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공중전화로 가서 친구들을 불러냈다.
“다 나와! 오늘은 내가 쏜다!”
처음으로 도둑질을 했는데도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도둑질한 건 다 엄마 때문이야.’
나는 못된 짓을 할 때마다 엄마뒤에 숨었다.
열어보면 항상 만 원짜리가 넉넉하게 있던 베갯잇에 돈이 없었다. 나는 엄마가 집안에 없는 것보다 30년 동안 훔쳐오던 베갯잇 돈이 사라진 게 더 불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