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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y 01. 2019

설국을 걷다

눈덮인 한라산, 정상에 오른 네 여자의 산행기

새벽 다섯 시 반, 잠을 설친 탓에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몸을 일으킨다. 오늘의 미션, 짐을 챙기고 침구 커버, 수건을 정리해서 1층으로 내려가기. 네 여자의 분주한 하루가 시작된다. 보온병과 라면, 당 충전을 위한 초콜릿을 각자 배낭에 나눠 담고 리무진에 오른다.





/ 관음사 입구
새벽부터 얇은 비가 내렸다. 매점에 들러 김밥을 사고 숙소에서 받은 장비를 착용한다. 한라산 등반이 처음인 친구들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스트레칭을 한다. 오전 7시 50분, 엄청난 인파가 몰려든다. 전국에서 모인 등산객과 함께 산행 시작. 눈밭 옆으로 굴거리나무가 보이고 자욱한 안개가 계속된다. 앞서 가던 가진이는 말했다. “이것도 나름 매력 있는데? 꼭 목욕탕에 있는 것 같아!” 얼마 후, 시야가 환해지고 다정한 인사가 오간다. 그렇게 스쳐가는 사람들과 나눈 뜨거운 문장은 마음에 소복이 쌓여 아름다운 기억이 된다.


“학생이에요?”
“아, 학생은 아닌데..”
“그때가 제일 좋을 때여.

그럼 나하고 바꿀까? 젊음 하고?”




군복 차림으로 열심히 달려가는 군인들, 아빠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걷는 아이, 예쁜 모자를 쓴 학생들. 많은 이들을 지나치자 탐라대피소가 나온다. 경량 패딩을 벗고 몸을 가볍게 한다. 후리스 위에 두꺼운 패딩까지 입은 지윤이는 한숨을 쉬며 옷을 정리한다. 근처에 계시던 아주머니의 외침. “아니, 한라산 춥다고 한 사람 누구야? 더워 죽겠네! 패딩 입고 왔으면 난리 날 뻔했어.” 고요한 정적을 깨뜨린다. “그래서 여긴 지금 난리 났어요.”





/ 개미등
힘들어하는 이레와 발을 맞춰 걷는다. 그렇게 한참 뒤에 나타난 두 번째 쉼터. 일찍 도착해서 쉬고 계시던 산악회 회원분들이 나눠주는 음식을 받는다. 군고구마와 오이, 귤 같은 건강한 음식이 배에 쌓인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먹을 게 필요하면 따라오라고 웃으시는 어른들. 산에서 받는 나눔은 따뜻하다. 간식을 먹으며 얻은 교훈 하나. 산에서 섭취해야 할 것은 초콜릿이 아닌 과일이라는 사실.

​/ 삼각봉 대피소
오전 11:21, 갑자기 안개가 개면서 눈 쌓인 한라산이 하얗게 빛난다. 다리가 아픈 이레에게 돌아가자고 했지만, 그녀의 완강한 고집에 산행을 이어간다. 힘겹게 도착한 대피소. 신라면에 물을 붓고 김밥을 꺼내 먹는다. 보온병에 담긴 물이 다 식은 건지, 라면이 익을 생각을 안 한다. 다행히 먹을 만하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오후. 여유 부릴 틈도 없이 다시 정상으로 향한다.






​/ 깔딱 고개
위험하고 경사진 길이 계속된다. 통제 시간에 겨우 맞춰 출발한 터라, 걸음을 서둘러야만 하산 시간을 맞출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이레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천천히 움직이기로 한다. 아픈 다리로 정상까지 가다 무슨 일이라도 날까 노심초사하며 걷던 중, 운 좋게 치료를 받는다. 길가에 멈춰서 다리 마사지를 하고 있는 우리를 본 젊은 부부가 스프레이를 꺼내 응급처치를 해주신 것. 산에서 받은 많은 감사의 순간을 기억하며 정상으로 향한다.




/ 1,947m 한라산 정상
관음사로 하산하는 사람들이 응원의 말을 던지며 발길을 재촉했다. 이레가 무사히 완주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백록담을 향해 걷는다. 지친 기색을 보이면 당을 나누기도 하면서. ABC초콜릿 한 입. 내 기준에서 내린 산 음식의 정의를 내린다. 산 아래의 초콜릿은 당을 위한 것, 산 위의 초콜릿은 생존을 위한 것. 그렇게 정상에 도착한 오후 1:35, 바다의 모래알 같은 수많은 사람이 백록담 앞에 떼를 지어 서있다.

사방에서 불어대는 바람에 덜덜 떨며 카메라 전원을 켠다. 구름에 싸인 한라산 꼭대기. 아침에 비가 왔다는 사실을 망각할 만큼 맑고 깨끗한 하늘이 펼쳐졌다. 백록담 앞에 섰다는 것에 기뻐하며 황홀의 순간을 천천히 누렸다. 네 여자 모두 무사히 정상에 오른 걸 감사하면서.




/ 진달래밭 대피소
오후 두 시, 하산 시작.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에 눈썹이 찡그려진다. 보온병에 담아둔 물은 다 마셨고 김밥과 전투식량도 전부 입안에 털어 넣어서 좀 가벼워질 줄 알았는데, 어째 아침보다 더 무거워진 기분. 그렇게 한 시간쯤 걸었을까? 다정한 장면이 보인다. 나란히 발을 맞춰 걷는 커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멀고 험한 길을 함께 걸었던 오늘은 훗날, 그들의 삶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하게 되겠지. 산 너머로 보이는 몇 개의 오름과 초록에 마음이 녹는다. 진달래밭 대피소 나무 의자는 이미 만석. 스틱을 한쪽에 치우고 햇빛 좋은 마루 바닥에 앉아 귤과 트윅스를 먹는다. 힘겨운 낮시간을 지나 보내고 함께 모여 간식을 먹는 오후의 하산길.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17:15 무사 하산. 평평한 땅을 밟고 조용한 환호성을 내지른다. 서로에게 수고의 박수를 보내고 쉼을 갖는다. 어둠이 내린 성판악 입구. 한라산 등정 인증서를 받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는데, 우리 앞에 멈춰 선 리무진 택시. 어떠한 고민도 없이 차에 올라 늘어진다. 기사님께서는 한라산에 다녀왔냐고 물으신다.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하자, 작은 선물을 나눠주신다. 집 앞마당에 심은 귤나무가 무럭무럭 잘 자랐다는 말씀에 미소가 번진다.





다시 돌아온 게스트하우스. 대여한 등산 장비를 반납한 후, 스태프에게 다가가 말한다. “저기, 아이젠 가방이 사라졌는데요. 사실 등산 스틱도..” 한 명은 스틱 분실, 한 명은 아이젠 가방 분실, 한 명은 아픈 다리로 겨우 하산. 몸은 멀쩡해서 다행이다.

“우리 놓고 온 거 없겠지?”
“그렇겠지 뭐, 가자.”
“엄지야, 이어폰에 스틱에.. 넌 아무래도 나보다 더 잘 잃어버리는 것 같아.”
(3초 뒤)
“박지영 씨? 한라산 등정 인증서 놓고 가셨는데요. 여기 한 장 더 있어요. 엄지윤 씨도요.”

인증서를 받은 두 여자는 개그 콘서트를 보기라도 한 듯 한참을 웃었다. 제주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제주도에서 가장 맛있는 고깃집을 찾아 나서는 것. 이로써 겨울 제주 여행도 무사히 막을 내린다. 아, 행복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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