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 셋이 함께 가면 엄마의 재미를 위해 딸들의 재롱(?)이 더해져 대환장파티가 이루어진다. 이 모든 재주는 우리 엄마에게서 물려받았다. 엄마는 80이 넘은 연세인데도 아직 목소리가 곱고 하이톤으로 노래를 잘 부르신다. 노인대학이나 할머니들을 모아놓고 약파는 곳에서 열리는 노래자랑대회에서 우리 엄마는 늘 1등이다. 그렇게 해서 상품으로 설탕도 휴지도 타고 어떤 날은 화장품도 탔다고 자랑하신다.
2002년 6월 9일, 온 나라가 월드컵으로 들썩일 때 아빠가 돌아가셨다.
새벽에 화장실에서 갑자기 쓰러지셔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계시다가 닷새 만에 영영 하늘나라로 가셨다. 고혈압이 있었지만, 평생을 술도 드시지 않고 금연하며 여름이면 얼굴과 팔다리가 새까매질 정도로 운동도 열심히 하셨다. 약도 시간 맞춰 복용하며 자신의 건강관리에 철저하신 분이 갑자기 돌아가시니 엄마나 자식 중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라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졌다.
너무나 이른, 아까운 나이 예순다섯에 돌아가셨다.
젊은 날 고생하여 자식들 키우고 이제 좀 살만하니 돌아가셨다고 주변에서 모두 안타까워하셨다. 이제는 아빠를 볼 수 없는 것이 우리 가족에겐 힘든 일이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주위에서 말하는 사람 좋은 웃음의 아빠였는데, 아빠 인생의 고단함 중에도 자식이 최고의 자랑이었던 아빠가 자식을 두고 가셨다.
늘 엄마와 함께 하는 일상으로 잉꼬부부였는데 엄마를 두고 가셨다.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분이셨으니 우리를 두고 가시면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우리가 슬픈 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아빠도 힘드셨을 것이다.
두 노인의 황혼결혼을 위한 시니어무비, 아빠가 계셨으면 이보다 멋진 장면이 연출되었을 텐데
<출처: 메기의 추억 영화 포스터>
메기의 추억은 우리 아빠의 18번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빠가 부르던 노래 두 곡 중 하나인데 하나는 애국가이니 나머지 하나는 자연스럽게 18번이 된 것이다. 18번이라고 하기에도 미안한데 우리 아빠는 음치이다.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도 잘 들은 적이 없다. 그저 자식들이 노래를 부르면 흐뭇하게 바라보며 웃을 뿐 더 이상의 제스쳐는 없는 분이셨다. 그래도 가끔 들을 수 있었던 노래가 ‘메기의 추억’이다. 내가 아는 메기는 물고기뿐이라 그냥 단순히 아빠가 부르는 옛날 노래로만 알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메기는 Maggie라는 여성이었다.
아빠의 발인일, 아빠를 산소에 모시러 가면서 노래를 불러드렸다.
아빠가 좋아하는 ‘메기의 추억’을 울면서 불러드렸다. 사람들이 힐끗 돌아보았다. 맏딸이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노래를 불러드리며 엄마와 나, 동생들은 아빠의 Maggie가 되었고 우리에게는 아빠가 Maggie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가시지만, 그 옛날 어린 우리가 노래 부를 때처럼 흐뭇하게 바라보며 울지않고 가시길 바랐다.
그래도 아빠를 말하면 아직도 엄마와 우리는 눈물이다. 내가 쓰는 브런치에 유독 아빠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그렇다. 우리에게 아빠는 좋은 남편, 다정한 아빠, 똑똑한 사람, 그리고 우리가 부모가 되어서야 알게 된 당신의 삶이 용감하고 안쓰러운 아빠이기 때문이다.
동생들은 어버이날이나 명절, 힘든 일이 있어 아빠가 보고 싶을 때 아빠 산소에 간다.
맏이인 나는 멀리 산다는 이유로 친정에 갈 때 가끔 아빠를 보러 가면 또 노래를 부르고 눈물 찔끔하고 돌아오곤 했었다. 몇 년 전부터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아 산을 오르지 못해 아빠에게 가지 못하고 있다. 맏이인 나를 기다리실 텐데, 내가 불러드리는 노래를 듣고 좋아하실 텐데.
엄마와 동생들은 공모전 당선을 축하해주며 아빠를 주제로 쓴 글이라 더욱 기뻐하였다.
글을 읽으며 또 한 번씩 눈물을 훔치고 아빠와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아빠는 돌아가셨어도 이렇게 맏딸이 좋아하는 일을 만들어 주시고 우리 가족이 함께 기뻐하고 웃을 수 있게 해주셨다.
녹음하고 책이 발행되면 아빠에게 자랑하러 가야겠다.
딸의 목소리가 방송으로 나오고 비록 60분의 1이지만 책 속에 딸의 이름이 있으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이제 울지 않고 메기의 추억을 부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