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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줌마 Oct 16. 2020

왜 그렇게 공부한다고 유난을 떨었을까?

학원 라이딩의 원조, 우리 아빠

쉐어링 개념의 전동 킥보드와 자전거를 공유하는 시스템이 우리 동네에 도입되었다.

산책길 곳곳에 세워진 주인이 없어 보이는 킥보드나 자전거가 몇 대 있더니 며칠 전부터 타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헬멧도 쓰지 않고 씽씽 달리는 것을 보니 위험하긴 하지만 재미있어 보여 나도 타고 싶어졌다.    


늦은 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아파트 담벼락 밑에 노란색 자전거가 있었다.

초록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담에 가로등 불빛이 비치고 그 가운데 서 있는 노란색 자전거가 정말 예뻤다. 누군지 모르지만 자기 다음에 공유 자전거를 타게 될 사람을 생각해서 밝은 곳에 자전거를 세워 둔 그 마음도 예뻤다.   

  

늦은 밤 자전거를 보니 문득 아빠 생각이 났다.

밤, 자전거, 달빛 아래의 추억이 떠오른다.  

  

우리 동네에는 인문계가 없어 옆 동네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였다.

중학교 입학 전 아빠가 알파벳을 가르쳐주고 잠시 주산학원에서 영어를 한 달 배워 선행학습을 했던 것처럼 아빠는 고등학교 입학 전에도 고교 영어 선행학습을 계획하셨다.    

 

고교 입학을 앞둔 나는 알파벳이 아닌 나름 고등 영어를 배워야 하는데 아빠가 가르쳐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주산학원 이후 3년 만에 다시 학원을 가게 되었다. 이번엔 진짜 영어학원이다.   

  

우리 동네에 인문계 고등학교가 없으니 영어학원도 없었다.

학교 옆에 있는 학원을 가기 위해 옆 동네로 버스를 타고 다니며  입학 전에 전설의 빨간 기본 영어를 배웠다. 우리 동네에서 그 학원을 가는 사람은 초등학교 동창 남학생 서너 명과 여학생은 나 혼자였다. 그렇게 학기 중에는 학교에서, 방학에는 학원에서 영어공부를 하였다.   

 

선행학습을 하는 친구들이 없던 때라 고등학교를 입학해서도 나는 또 영어 영재처럼 되었다.

고1 여름방학, 학원을 다니며 빨간 기본 영어를 끝냈다. 다시 겨울 방학이 되어 학원을 가면 된다.

   

빨간 기본 영어 다음 단계는 성문 기본 영어이다.

나는 겨울 방학까지 기다리기 싫었다. 학교와 학원을 병행하고 싶었다. 나처럼 영어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이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의 영어 영재처럼 자리가 위험해지는듯하여 조바심이 났다. 그 친구들은 학교와 학원이 같은 동네이니 학원을 다니기도 수월하였다.    


평일의 학원 수강 시간은 저녁이다.

강의마다 시간 차이가 있는데 하필이면 성문 기본 영어는 꽤 늦은 시간이다. 그 시간에 시골 버스는 운행하지 않는다. 집이 멀어서 하교 후 남는 시간도 너무 많고 어찌어찌 기다려서 학원을 가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더 큰 문제는 나의 욕심이었다. 안된다고 생각하니 더 욕심이 났고 나는 기어코 학원을 가고 말았다.    


아침에 버스를 타고 학교를 간다.

하교 후 부리나케 정류장으로 뛰어가 집으로 오는 버스를 탄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다시 버스를 타고 학원을 간다.

아빠는 저녁 식사 후 딸의 학원이 마치는 시간에 맞추어 자전거를 타고 십리도 더 떨어진 옆 동네 학원으로 간다.

딸은 아빠의 자전거 뒤에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그 시절 아빠와 나의 루틴이었다.    


아빠는 주로 서서 일하는 직업이다.

퇴근 후 편히 쉬어야 하는데 맏딸의 욕심에, 그리고 당신의 자식 교육의 훌륭한 성공을 위해 그 고단함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아빠는 무서움이 없는 줄 알았다. 

큰길이라 해도 신작로 옆에는 거의 논밭이었으니 가로등은 고사하고 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도 없는 곳이 많았다. 나는 자전거 뒤에 타고 아빠 등에 달라붙어 오니 캄캄한 밤길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딸을 데리러 혼자서 그 캄캄한 길을 오실 때 아빠도 무서우셨을 것 같다.

   

아빠는 힘이 센 줄 알았다.

시골길은 울퉁불퉁하고 읍의 경계를 넘나드는 거리였기 때문에 가파른 길도 있었다. 덜컹거리고 가파른 고갯길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렸었는데, 게다가 아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니 이십 리도 더 되는 거리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한 번씩 자전거가 멈추었을 때 아빠는 힘이 들었었다.     


아빠는 지치지 않는 줄 알았다.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곤 학원을 매일 갔다. 당연히 아빠도 매일 밤 자전거를 탔다. 내가 땡땡이를 쳐야 아빠가 쉴 수 있었는데 모범생이었던 나는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 번쯤 아빠도 땡땡이를 치고 싶었을 텐데, 귀찮았을 텐데 아빠는 지지지 않는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고단함을 감추셨던 것 같다.

   

 

그러다 학원을 그만두게 된 사건이 있었다.


캄캄한 밤 달빛 아래 아빠와 내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이 다른 사람의 눈엔 연인처럼 보였다.

시골의 늦은 밤거리에서 껄렁거리는 날라리 무리들이 이상한 말을 했다. 그때마다 아빠는 페달을 힘껏 밟아 그곳을 빨리 지나가는 것으로 피하곤 했다.    


매일 밤 같은 시간에 두 남녀가 본인들의 시시껄렁한 말과 시비에 아무 대꾸도 없이 가니 재미가 없었던지 어느 날 밤에 뾰족한 무엇을 아빠와 나를 향해 던졌다. 다행히 맞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 학원을 가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학원 라이딩의 원조 우리 아빠와 달빛 아래 학원 다니기는 위험천만 아찔하게 끝이 났다.  


아빠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마는 또 얼마나 애가 탔을까?

힘이 드는 것 외에도 어두운 밤길이 위험하여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해서 엄마는 딸과 함께 아빠가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좌불안석이었을 것이다.

나는 왜 그렇게 철이 없었을까?

내 욕심이 앞서 엄마 아빠의 힘듦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딸이었다.

뭘 얼마나 공부를 하겠다고 그렇게 유난을 떨었을까?   

  

아빠는 안 계시지만 엄마와 우리는 아빠를 자주 이야기한다.

“엄마 아빠는 우리 키울 때 힘들었지?”

“공부 열심히 하는 자식들이 예뻐서 엄마 아빠는 힘든 줄 모르고 살았어. 괜찮아”

   

힘든 줄 모르고 살았다는 말은 힘들었었다는 말이다.

이제는 그때의 엄마 아빠 나이보다 나이가 많아진 자식들인데도 엄마는 다 큰 자식들이 돌아가신 아빠께 미안해할까, 아빠의 고단함을 아파할까 싶어 괜찮다고 하신다.    


역시 자식사랑의 끝판왕! 우리 엄마 아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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