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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줌마 Oct 08. 2020

동생의 운명이 바뀔 뻔했다.

둘째는 여상 보내면 안 될까요?

주말 아침, 친정 식구들의 단톡방이 울린다.

십중팔구 둘째이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움직일 사람은 둘째밖에 없다. 워킹맘이면서 주말에 쉬지도 않고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는 것이 힘들 텐데 동생의 카톡 사진은 농산물과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봄에는 가지런히 정리된 밭에 씨앗이 뿌려진 예쁜 밭고랑이 등장한다.

여름엔 각종 수확한 채소들이 가득하다. 밭일도 하고 친정엄마까지 모셔가서 큰 솥에 백숙도 하여 맛있게 먹으며 엄마의 주말을 행복하게 한다. 부지런의 끝판왕이라 채소를 가져와서 다듬고 나누어 두 동생과 엄마 몫으로 나누어 배달도 한다. 가까이 사는 친정 식구들은 여름 내 무농약 채소를 공급받는다.

가을이면 산밤을 주워 나누고 도토리를 주워서 묵을 만들어 나눈다. 작년 가을엔 내가 사는 곳 근처에 볼일이 있다고 오면서 밤과 도토리묵, 반찬까지 만들어 가지고 와서 주고 갔다. 언니 같은 동생이다. 사 먹는 밤과 달리 동생이 준 산밤은 정말 맛있었다. 아마 동생의 정이 더해져서 더 맛있었을 것이다. 

 두 동생과 엄마 몫으로 봉지봉지 나누고

그뿐 만이 아니다. 어느 날은 서울, 어느 날은 부산, 어느 날은 강원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산이며 바다의 멋진 풍경도 보낸다.    

 

우리 집 사남매는 성격이 다 고만고만하다. 어디 한 군데 모난 곳도 없고 튀지도 않으며 내성적인 성격은 아니나 그렇다고 특별히 외향적이지도 않다. 외향적인 성격 면에서 볼 때 둘째는 달랐다. 어릴 적, 우리 집에 매니큐어가 없는데 둘째의 손톱은 빨간 매니큐어가 자주 칠해져 있었다. 동생의 신발이 훨씬 더 빨리 닳는다. 나는 가보지도 않은 동네까지 놀러 다닌다. 아는 사람이 많다. 엄마 표현에 의하면 발발거리며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사 남매 중 둘째이다 보니 맏이, 아들, 막내에 치여 순하게 자랄 수밖에 없었다. 외향적인 성격까지 더해져 그렇게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즐겁게 사는 둘째는 엄마 아빠가 볼 때 넷 중에 가장 키우기 쉬운 자식이었다.

   

동생이 중3, 고교 진학을 앞둔 시기였다.


“둘째는 여상 보내면 안 될까요?”

아빠는 딸은 교사, 아들은 의사로 키우려고 계획하셨지만 엄마는 자식 넷을 대학을 보내면 버거울 것 같으니 둘째를 상업계에 보내서 조금이나마 경제적인 힘을 덜어보면 어떨까 했다.

엄마로서는 두리뭉실하게 착하고 외향적인 성격에 손도 야무져 엄마 일도 곧잘 도우니 상업계를 가도 자신의 장래를 잘 개척해서 잘 살 것으로 생각하였다.   

 

“안되지.”

부모가 조금 힘들더라도 아니 많이 힘들더라도 자식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 아빠의 생각이었다. 아직은 어려서 부모의 뜻을 따르더라도 어른이 된 후 둘째가 부모를 원망하는 삶을 살아갈까, 다른 세 자녀와 다르게 펼쳐지는 삶이 더 행복하면 괜찮겠지만 객관적으로 보아 그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게다가 그 말을 들은 둘째의 닭똥 같은 눈물에 엄마와 아빠는 미안하여 어쩔 줄을 몰라하였다.   

 

동생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 중이며 관리자로 승진하기 위해 학교에서도 중한 업무를 맡으며 바쁘게 살아왔다. 교감 승진 대상자로 연수도 마치고 곧 교감님으로 발령이 날 것이다. 여상으로 끝날뻔했던 학력은 박사과정 공부까지 하여 우리 집에서 가방끈이 제일 길다. 마당발이라 여러 분야의 만나는 지인도 꽤 많아 국회의원은 아니더라도 구의원 정도는 출마해도 될 것이라 우스개로 말한다. 요리 솜씨도 좋고 손이 빨라 후딱후딱 맛있게 잘 차려내며 맛있게 만든 음식을 나누기도 좋아한다. 농사지어 거둔 수확물은 나누는 기쁨으로 살며 경제적인 흐름도 잘 파악하여 둘째네 재산형성에 제부보다 더 많은 역할을 했다. 가까이 있는 친정엄마나 동생들까지 챙기며 넉넉한 마음으로 잘살고 있다.    

 

직접 만든 도토리묵으로 만든 요리, 솜씨가 좋아 맛도 좋아요

아빠의 신중한 결정으로 동생은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고 대학을 진학하여 우리 4남매는 모두 비슷하게 청춘을 보냈다. 아빠가 그때 그 결정을 하지 않았더라면 동생의 운명은 바뀌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때 둘째가 여상을 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를 이야기를 하곤 한다. 아마 여상을 갔어도 부지런함과 외향적인 성격으로 뭐라도 되어있을 것이다. 분명히 자기의 운명을 개척하여 멋진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지금과는 다른 어려움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머지 우리 남매는 그만큼 미안해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살아야 했을 것이고. 아빠의 자녀교육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단지 둘째의 미래뿐 아니라 우리 4남매가 우애 있게 잘 살아가는 데에도 큰 몫을 하였다.    

 

나는 친정과 먼 곳에 살아서 직장을 다니며 아이 둘을 울면서 키울 때 엄마 아빠는 둘째와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둘째의 아이들 둘을 다 키워주셨다. 아침에 아이들을 맡기러 와서 밥을 먹고 출근하고 저녁이면 엄마 집에서 놀다가 아이들을 데려갔었다. 막내가 아이들을 키울 때에는 아빠가 돌아가셔서 엄마 혼자 키워주셨다. 엄마 아빠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도 둘째이다.

엄마 아빠는 그 옛날 둘째에 대한 미안함을 그렇게 갚은 것은 아닐까?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그래도 둘째 마음에 상처를 준 것에 대한 미안함은 엄마 아빠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남아있다. 바쁜 워킹맘 생활 중에서도 승진을 꿈꾸고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치열히 살아온 둘째에게 박수를 보낸다.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우리 둘째가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된다고 엄청 좋아하시며 동네방네 자랑하셨을 것이다. 

“우리 둘째가 교감이 된다네. 내가 그때 인문계 보내길 잘했지.”    


아빠의 계획과 결정은 늘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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