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줌마 Aug 09. 2020

 〔에므오아루에누아이에누지〕

나의 첫 영어선생님, 나를 나답게 만들어 준 첫 걸음

  

중학교 입학을 앞둔 2월, 나는 처음으로 학원이라는 곳을 갔다. 그 당시 시골에 있는 학원이라곤 주산학원이 다였다. 나는 산수도 잘하는데 뜬금없이 웬 주산? (셈하기가 느린 아이들이 계산력 향상을 위해 주산학원을 다니는 경우가 많았음) 더욱이 우리 집은 학원을 다닐 만큼 넉넉하지 않았는데 아빠는 아빠만의 백년지대계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주산학원을 가기 일주일 전부터 아빠가 내게 영어를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알파벳도 어느 정도 익히고 영어단어도 몇 개 배웠다.

    

시장통 싸전 앞에 있는 주산학원은 장날이면 시골 할머니들의 톤 업 된 흥정소리로 시끄러웠다. 겨울이라 풀빵 굽는 기계의 고소함도 있었고 가끔씩은 우시장에 끌려가는 소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그런데도 내 아련한 기억 속엔 조용하고 평온한 한나절의 모습으로 남아있고 나는 그 가운데를 뚫고 학원 문을 들어선다.  

  


1교시, 처음 만져 보는 주판알을 이리저리 튕기다 “1원이요, 2원이요~~~~~” 하는 소리를 몇 차례 듣다 보니 어느새 주산으로 덧셈도 뺄셈도 하게 되었다.

2교시, 주산 선생님이 영어 선생님으로 변신하더니 중학교 1학년 첫 단원에 나오는 영어단어를 가르쳐주셨다. 그제야 알았다. 아빠가 나를 주산학원을 보낸 것도, 갑자기 영어단어를 가르쳐준 것도, 중졸의 촌부이지만 교육열이 높았던 아빠(모태선생, 나름士자집안)가 맏딸이 중학교를 간다니 나름 선행학습을 시키고자 하셨던 것이었다. 주산학원에서 방학 동안 특강 형식으로 잠깐 영어를 가르친다 하니 중학교 입학 전에 영어를 익히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첫날 영어수업시간에 나는 영어영재가 되었다. 아빠의 선행학습 덕분에 다른 아이들은 ABC를 겨우 읽을 때 나는 ABC의 읽기 뿐 아니라 쓰기도 하였고 다음 시간에 배운다는 내용도 미리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어영재로서의 날들이 지난 며칠 후, 아빠에게 배운 영어랑 영어 선생님으로 변신한 주산 선생님이 가르쳐준 영어는 달랐다.

How are you? I am fine  thank you and you?  I am fine.으로 영어 인사도 자연스럽게 배우고 영어가 재미있어졌다.


그런데, Good morning에서 문제가 생겼다.

분명히 아빠는 morning이라 쓰고 〔에므오아루에누아이에누지〕라고 외우라고 가르쳐주셨다.

“Good morning을 칠판에 나와서 쓸 수 있는 사람?”

“저요”

호기롭게 나가서 칠판에 쓰며 보란 듯이 소리 내어 읽었다.

“지오오디 에므오아루엔아이엔지”

“morning 스펠링 말해볼래”

“에므오아루애누아이엔지” 선생님은 크게 웃으며 “엠오알앤아이엔지”라고 수정해주었다.

중졸의 아빠는 아빠가 알고 있는 최대한의 지식을 내게 가르쳐주었지만 일본식 영어를 배운 탓에 M은 에무, N을 에누, R은 아루라고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잠깐 영어영재의 막이 내리는 듯했으나 아빠의 계획은 역시 적중하였다.    

나는 아빠에게 배운 일주일 영어와 주산학원에서 배운 한 달 영어로 중학교 입학을 한 후 진짜 영어영재처럼 영어를 잘하고 좋아하는 중학생이 되었으며, 고등학생 때는 교내 영어 말하기 대회 최우수상을 받아 도대회 영어 말하기 대회에 시군 대표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교육대학 진학 시에도 영어과를 입학하였다.

 촌부인 우리 아빠는 내가 영어에 관심을 갖고 잘할 수 있게 초석을 깔아주셨고 영어를 잘하게 되니 자연스레 다른 과목에도 자신감을 갖게 되어 학창 시절 내내 공부 잘하는 우등생이 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줄 알고 자랐지만 영어를 좋아하고부터, 고3이 되어 진로를 결정할 때에 나는 사범대 영어교육과에 진학하여 영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 당시 라디오와 신문을 탐독하며 세상의 변화와 미래의 발전 양상을 배우던 아빠는 내가 사범대학을 졸업할 4년 후의 교사 수급상태까지 예상하였다. 과에서 1등이나 2등을 해도 발령이 나기 어려우며, 발령이 나더라 도시가 아닌 시골 발령이 나면 힘들 것이다라는 예상을 하시며 교대 진학을 권유하셨다. 아빠 예상대로 4년 후 사범대 졸업생들은 발령이 나지 않았고 나는 보란 듯이 1986년 3월 1일 자 첫 발령이 났다.

아빠는 나의 대학 진학, 나아가서 직업을 선택하는 데에 현명한 결정을 할 수 있게 초석을 깔아주셨고 그렇게 나는 영어를 좋아하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자라면서 아빠에게 혼이 난 기억이 없다. 특별히 나쁜 짓을 하거나 공부를 하지 않아 부모님 속을 썩이지는 않았지만 자식 교육에 욕심이 많은 아빠 눈에 부족한 면이 보였을 텐데......

아빠는 자식을 믿고 기다려주셨다. 성적이 조금 떨어져 장학생이 되지 않았을 때에도 속상해할 자식의 마음을 더 걱정해주시며 웃음으로 할 말을 다하셨다.    


첫 발령이 난 날, 조회대 위에서 떨리는 모습으로 발령 인사를 하던 나를 학교 담장 너머에서 아빠가 바라보고 계셨다. 맏딸이 선생이 되어 첫 출근하는 모습을 보고 싶고, 응원하고 싶어서 아빠는 시골에서 새벽기차를 타고 대구에 오신 것이다. 그때 다짐했다. 교사로서의 나도 아빠가 믿을만한 괜찮은 선생이 되어야겠다고,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려 노력하며 교사생활을 해왔다.

   

내가 첫 딸을 낳은 날, 아빠는 자식을 낳은 딸이 대견하기보다는 딸의 고단함이 안쓰러우셨다. 내가 친정에 갔다 돌아오는 날은 늘 아빠가 시골에서 대구까지 동행하셨다. 맏딸이 혼자서 손녀를 데리고 가면서 힘들까 봐 늘 함께 오셔서 집까지 데려다주고 아빠 혼자 완행버스를 타고 쓸쓸히 되돌아 가셨다. 그렇게 나는 부모가 되어 가는 것도 아빠에게 배웠다.    


그렇게 우리 아빠의 교육열과 자식사랑은 그 시절 다른 부모님들에 비해 유별나고 특별했으며, 아빠는 우리 4남매가 교사가 되고 의사가 되며, 부모가 되어 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34년을 끝으로 명퇴를 하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사람이 우리 아빠이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그곳에서도 “희야, 잘했다. 34년 동안 수고했다”라고 해주실 것이다. 내가 가장 아빠에게 죄송하고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 비록 관리자로 승진하지 않고 평교사로 퇴직을 했지만 아빠는 분명히 웃음으로 나의 34년을 칭찬해주실 것이다.   

 

morning이라 쓰고 〔에므오아루에누아이엔지〕라고 가르쳐주신 나의 첫 영어 선생님, 우리 아빠.

혼내지 않고 믿음으로 기다려주던 우리 아빠의 웃음 속 가르침으로 교사로서, 부모로서  나답게 시작할 수 있는 첫 걸음이 되었다. 가끔씩 화가 나는 일이 있어 미친 듯이 폭발하고 난 후에는 아빠의 웃음을 떠올린다.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이전 02화 그 시절, 엄마가 긴 생머리였던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